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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가난뱅이의 도(道)

<다세포소녀> <소림축구> <천국의 아이들> 등으로 본 가난뱅이의 도(道)

<다세포소녀>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던 1990년대의 어느 여름, 선배 한명이 초췌한 몰골로 나타났다. “나 익사할 뻔했어.” 뭐야, 돈 없다고 술값 걷을 때만 되면 취한 척하고 도망가더니(집안 3대가 말술) 혼자 물놀이하고 온 거야? 그것도 장마철에? 선배는 울먹였다, 공짜 밥으로 토실했던 뺨이 홀쭉했다. “자다가 숨이 막혀서 눈을 떴더니 내가 물속에 잠겨 있더라고.” 장마로 동네 하수도가 넘쳐서 선배가 살던 반지하 방에 물이 찼던 거였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다더니, 당황한 선배는 20cm도 안 되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간신히 뭍으로 탈출, 젖은 세간살이를 포기하고 본인 몸이라도 말리고자 학교에 왔다는 사연이었다.

에어컨 나오는 도서관을 찾아 표표히 떠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그럴 수밖에, 우리도 대부분 반지하나 옥탑방에 사는 가난한 지방 출신 유학생들이었으니까(그렇다면 그 많은 1층과 2층엔 도대체 누가 살았던 걸까, 하긴 이회창은 60년 넘게 서울 살면서도 옥탑방이 뭔지 몰랐다지만). 그날 이후 가난이 당당했던 선배는 변했다. 같은 메뉴로 리필이 가능한 학교 식당에서 800원짜리 짜장면을 양념까지 핥아 먹어 흔적을 지운 다음 1300원짜리 우동을 받아 먹는 노하우를 환한 얼굴로 전수해주던 선배는… 돈독이 올랐다. 우리랑 노는 대신 밤낮없이 과외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반지하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던데, 어제든 모레든 일단 태양이 보여야 말이지.

그로부터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가난한 청춘의 사정이란 십 몇년이 무색하게 제자리여서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실업자 세진(정유미)은 반지하를 벗어나 “햇빛 잘 드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 반지하란 참 싫은 곳, 방세가 없어서 반지하 얻은 건데 종일 형광등 켜놓고 사느라 전기세가 많이 나와 미묘하게 헛짓한 듯한 느낌이 들지. 곰팡이랑 나방이랑 그리마랑 놀다보면 온갖 잡충이 날아들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 시골 놀러온 기분이야, 흐뭇하게 돌아누우면 귀뚜라미가 진짜로 옆에서 울고 있는 그런 곳?

하지만 세진이가 몰랐던 사실이 있으니, 반지하에서 나오면 햇빛 찬란한 날들이 펼쳐질 것 같은가! 난 6층 사는데도 앞집 때문에 햇빛이 안 들어 오전 11시가 넘도록 잘도 잔다. 2천만원만 더 있었으면 8층으로 올라가 방 안에서 선크림 바르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다세포소녀>의 김옥빈처럼 가난을 등에 업고 다닌 세월이 어언 수십년, 본의 아니게 가난뱅이의 도(道)를 닦은 한생이었다. 한데 도를 닦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가난은 가난을 부르는 법, 숱한 가난뱅이와 얽혀 살다보니 전수받은 도 또한 만만하지가 않다. 1만원으로 평균 주량 소주 두병인 사람 셋이 취하는 법이라든가(소주를 빨대로 마시거나 티스푼으로 떠먹거나 삼키기 전에 입에 머금고 있으면 된다), 900원으로 20대 남자 셋이 배부르게 먹는 법이라든가(밥과 김치를 알아서 가져다 먹는 학생식당에 가서 식권 한장을 사면 된다, 지금이라면 2천원은 들겠지).

<천국의 아이들>

그런 나에게도 범접하지 못할 가난의 경지가 있었으니 <천국의 아이들>의 알리와 자라다. 집에 신발이 한 켤레밖에 없는 이 아이들은 견우와 직녀처럼 오전반과 오후반 사이에 스치듯 만나 신발을 교대로 신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데… 아, 그냥 맨발 할래, 가난보다 뛰는 게 힘들어, 발바닥 지압이 몸에 좋다며 있던 신발도 벗고 다니는 중년이란 말이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신발이란 내가 가난하구나 깨우치게 하는, 소공녀 세라의 민친 교장 같은 존재랄까, 옷은 대충 얻어 입어도 신발은 대충 얻어 신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난 체험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작가 조지 오웰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말한다, 취직하려면 먼저 구멍난 신발을 감춰야 하니까 양말을 검정 잉크로 칠해라.

<무장원 소걸아>

가난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 주성치다. 지금이야 백만장자이지만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지금도 돈을 향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이 슈퍼스타는(그래서 주성치 인터뷰하러 가면서 두근두근 우리 회사로선 최선이었던 무려 50만원을 현금으로 받아 갔지만 매니저가 됐다고 말하며 비웃었음. 그리고 난 그 푼돈을 잃어버릴까 걱정돼서 아침저녁으로 호텔 금고 점검), <무장원 소걸아> <소림축구> <CJ7-장강7호> 등에서 거지와 빈자를 탁월하게 묘사했는데, 그중 <소림축구>엔 이런 장면이 있다. 번화가를 벗어나 주성치가 사는 동네와 가까워지면서 드러나는 빈부 차이를 단지 행인들의 신발만 찍어 설명하는 것. 가난해보지 않은자, 신발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리니. 하지만 가난해도 신발보다 먼저 누리고 싶은 기쁨은 있다.

<소림축구>

<소림축구>의 가난한 오맹달이 마시는 맥주는 내가 좋아하는 산미겔, 일본 놀러갔다가 본 노숙자가 마시던 맥주는 내가 좋아하는 삿포로,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요.

몇년 전에 최저생계비 6300원으로 하루 살기 체험을 한 새누리당 의원은 공식 홈페이지에 그 돈으로 황제처럼 살았다는 수기를 올렸다. 아침은 970원짜리 쌀국수, 점심과 저녁은 밥에 각각 970원짜리 미트볼과 참치캔을 반찬으로 먹었더니 돈이 남아서 기부도 하고 문화 생활도 했다고. 이 양반이 삼시세끼 딱 1년만 그렇게 먹다가 변비로 피를 한 바가지 쏟아봐야 최저생계비가 남아돈다는 헛소리를 그칠 텐데.

올해도 최저임금이 7천원을 넘지는 못할 것 같다. 물론 그 돈으로 밥만 먹고 잠만 자면서 살 수는 있을 것도 같다. 책이나 신문이야 도서관 가서 보면 되겠지. 원래도 가난했는데 더욱 가난해진 요즘 시원한 도서관에서 ‘황제처럼’ 쾌적하게 읽은 책은 <더 좀비>라는 좀비 앤솔러지였다. 34편에 달하는 그 다채로운 단편들에 등장하는 좀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먹고는 산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하여 누구도 좀비가 살아가고 있다 말하지는 않는다.

푼돈의 소중함

양극화 세상에서 가난뱅이가 살아남기 위해 주목해야 하는 두세 가지 것들

현물에 주목한다

정기적으로 시골 취재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생긴 게 맏며느릿감이어서(다시 말해 얼굴이 보름달처럼 오동통…) 어르신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나는 시골만 갔다 하면 텃밭 채소와 각종 반찬을 한 보따리 얻어 돌아오곤 했다. 만국의 가난뱅이들이 단결하기를 역설하는 <가난뱅이의 역습>의 저자 마쓰모토 하지메도 이런 지혜를 전수한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온갖 물건을 주워 올 쓰레기장이 없었다면 <CJ7-장강7호>의 주성치 부자는 맨발에 TV와 선풍기도 없이 지냈을 거다. 아, 근데 난 도대체 얼마나 가난했길래 2년 동안 선풍기 없이 지냈던 거지?

<티끌모아 로맨스>

동전에 주목한다

<티끌모아 로맨스>의 구두쇠(이자 한때 가난뱅이였지만 구두쇠가 됨으로써 이제 가난뱅이는 아닌 건가 하다가 사기를 당하면서 다시 가난뱅이로 전락한) 홍실(한예슬)은 푼돈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한개 50원짜리 맥주병을 365일 모으면 옥탑방 1년 수도세가 나오는 기적을 펼쳐 보인다. 원통하다, 내가 하루에 배출하는 맥주병이 몇갠데! 아, 난 병맥주보다 싸다고 페트병으로 사다 마시지(절대 양이 많아서가 아님). 무릇 가난뱅이라면 동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만화 <타로 이야기>의 엄청나게 잘생기고 상상을 초월하게 가난한 소년 타로가 발휘하는 초능력도 그거다, 저 멀리 동전 한개가 떨어지는 소리도 알아듣는 빈자의 청력.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공짜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가난뱅이라면 얻어먹고 철판 까는 것은 물론이며 다다미를 뜯어 먹는 초인적이며 초식적인 능력까지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쓰모토 하지메도 이건 안다, “폐만 끼치는 구두쇠가 되는 것은 인간 말종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열살짜리 가난뱅이도 터득한 삶의 지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초등학생 지소(이레)는 시식을 일삼는 동생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하지, 한번 무시당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근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난 그 자체만으로 무시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이 이 순진한 아이가 모르는 삶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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