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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허우샤오시엔의 무협적 세계

<자객 섭은낭>을 중심으로 본 허우샤오시엔 작가론 (이론비평 요약)

<자객 섭은낭>

우리는 현실에 거주하며 비현실을 열망한다. 어쩌면 영화적 세계가 간직한 비현실성은 우리를 영화 앞으로 불러내는 치명적 주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떤 종류의 영화적 비현실성은 그 장르의 지배적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협 역시 그러한 경우이다. 무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강호’라는 초현실적 세계, 판타지적 강인함을 가진 무림의 고수들, 그들이 펼치는 무협 대결과 낙엽처럼 나부끼는 살육과 죽음의 풍광들. 물론 파편적인 이미지로 하나의 장르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무공의 고수들이 벌이는 판타지적인 무협 대결은 대부분의 무협영화가 품는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허우샤오시엔의 무협영화, <자객 섭은낭>(2015)의 막이 올랐다. 이 영화는 관객의 머릿속에 하나의 물음표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제껏 본 무협의 풍광이 삭제된, 또는 철저히 절제된 이 영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며 영화의 압도적 미학과 아름다움은 이 물음표마저 흐릿하게 지워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흐릿해진 의문을 선명하게 되살려보기로 하자. <자객 섭은낭>은 어째서 무협영화인가. 철저히 절제된 판타지, 최소화된 움직임에도 이 영화를 무협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자객과 도사라는 설정, 부분적 검술 장면인가. 리얼리즘 사이에 흩어진 무협의 흔적들인가. 진정 무엇이 이 영화를 ‘무협’으로 만드는가.

그에 대한 대답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속 카메라의 시선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육안과 닮은 카메라의 시선은 누구의 것도 아닌 카메라 그 자체의 시선으로서 늘 그 자리에 존재해왔다. 그의 롱테이크는 대개 홀로 부유하였으며 결코 누군가에게 속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자객 섭은낭>에 이르러 롱테이크들은 마치 스스로가 누군가의 소유임을 밝히려는 듯 자꾸만 어느 인물의 눈동자로 수렴한다. 이러한 귀속은 단순히 한 인물의 시선뿐만 아니라 그의 무공과 관련이 있다.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자는 더 강한 무공을 지닌 자이다. 결국 <자객 섭은낭>에서 무협이란 두 가지 결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칼을 다루는 검술의 능력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를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이다. 허우샤오시엔은 무협에서 칼과 피를 덜어내고 남은 곳에 시선의 무공을 채워넣었다. 이 무협영화의 주인공이 움직임을 지극히 절제하는 대신 누군가를 고요히 응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자객 섭은낭>의 생생한 리얼리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하나의 강력한 판타지가 숨어 있다. 가장 강한 무공을 얻어 가장 많은 것을 보는 자라도 끝내 볼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시각에 담을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를 타고났다. 그래서 영화는 섭은낭(서기)이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의 방도를 마련하였는데, 바로 ‘거울’이다. 섭은낭이 운명적으로 전계안(장첸)과 재회한 뒤, 그녀는 지나간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전계안과의 혼인이 약속되었던 섭은낭 대신 그녀의 자리에 뛰어든 것은 전계안의 첫째 부인, 전원씨이다. 그녀는 전계안의 혼인날을 중심으로 정확히 섭은낭이 살아야 했을 인생을 살고 있다. 전계안이 섭은낭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전원씨는 그 거울에 비친 섭은낭의 운명이다. 섭은낭과 전원씨는 서로 운명적 거울 관계에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그녀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찢어진다. 전원씨는 섭은낭의 부친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고 섭은낭은 이를 저지한다. 또한 전원씨는 호희의 임신을 이유로 그녀를 죽이려고 하지만 섭은낭은 그녀를 구출한다. 섭은낭이 누군가를 살리는 길을 걷는다면 전원씨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해쳐야 하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섭은낭은 자신이 과거의 인연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당도하였는지를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거울 속 운명이 해치려는 생명들을 자신의 손으로 살려낸다. 호희를 살리고서 그녀의 임신 사실을 전계안에게 말하던 순간, 그녀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완전히 이별하였을 것이다. 섭은낭은 결국 강해지기 위하여 맡은 임무에서 실패하고 만다. 아니, 도리어 그녀는 강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반복된 실패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 시간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것같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을 우리는 ‘순리’라고 한다. 거기에는 이유도 예외도 없다. 섭은낭의 실패 역시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유도 예외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실패 그 자체로서 그곳에 있다. 섭은낭의 실패는 이 영화적 세계의 순리로서 존재한다.

영화의 초반 흑백화면이 이어지는 동안, 섭은낭은 단 한번 표적을 베어서 낙마시킨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섭은낭의 임무 완수의 순간이다. 우리는 굳이 원작 소설을 찾지 않아도 그녀가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객 섭은낭>이라는 타이틀이 오르고, 화면이 컬러로 바뀌면서 그녀는 단 한번도 임무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흑백화면으로 표현되는 설화 속의 대단한 섭은낭이라도 내 영화 안에서는 아무도 해치지 못하리라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국 실패에 관한 영화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지 않다. 실패는 늘 성공의 이면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자객 섭은낭>은 끊임없이 실패하는 것들이 아닌 끊임없이 살아남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검과 시선의 무협, 스스로를 직조할 정도의 무공을 넘어 마침내 도달한 곳이 고작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사실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허우샤오시엔이 생각하는 무협의 마지막이다. 영화 내내 섭은낭을 속박하는 현실이란 강자에게 더욱 엄중하게 요구되는 자연의 섭리를 말한다. 그것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고, 함께 떠나기로 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고, 아이의 부모를 가엽게 여기는 지극히 사소하고 인간적인 감정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섭은낭은 단순한 표적이 아닌 한명의 인간을 지켜내고 영화는 그런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결국 허우샤오시엔은 무협이라서 벨 수 있는 것이 아닌, 무협으로도 벨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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