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처절한 고통의 기록
오승욱(영화감독) 2016-08-09

미야자키 마사루와 요시모토 고지의 <블랙잭 창작비화>

미야자키 마사루와 요시모토 고지의 <블랙잭 창작비화>.

달도 차면 기울고 활짝 핀 꽃도 시간이 흐르면 시들어 땅에 떨어진다. 1950년대와 60년대 일본 만화의 대명사와 같았던 데즈카 오사무도 7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드넓은 자기 집 마당에 건물을 보란 듯이 세우고 제2의 월트 디즈니를 꿈꿨던 애니메이션 사업을 접어야 했고, 무시 프로덕션도 부도를 맞아 정리해야 했다. 게다가 만화잡지의 연재도 끊어졌다. 데즈카 오사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자신의 어시스턴트들에게 <소년 매거진>에 연재 중이던 가지와라 잇키 원작, 가와사키 노보루 만화의 <거인의 별>을 펼쳐 보이며 이런 만화가 어떻게 재미있느냐고 물었던 일은 이 시기의 유명한 일화다. 60년대 중반부터 반(反)데즈카 오사무를 외치는 만화가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만화를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와 구별해 극화라 이름 붙였다. <생존게임>과 <고르고 13>으로 유명한 사이토 다카오가 그 선두 주자였다. 50년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보고 자란 소년, 소녀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다. 60년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우주 소년 아톰>을 보고 자란 세대들은 이제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 되었고, 새로운 독자들은 <거인의 별>과 <내일의 죠>에 열광했다. 나가이 고의 만화 <파렴치 학원>은 학부모들이 증오하는 만화로 연재 중단을 요구하며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지만 소년 독자들은 이 만화를 지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복물이라는 명칭으로 중학교 교복을 입은 소년들이 패싸움을 하는 열혈 소년만화 <사나이 카키 대장>은 소년들의 혼을 빼놓았다. 데즈카 오사무의 어시스턴트였던 만화가들이 독립해 자신들의 시대를 열었으며, 그 뒤로 오지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배를 쫄쫄 굶으며 희망이라고는 도쿄로 올라가 만화가가 되는 것뿐이라 믿었던 소년들이 그린 손때 묻은 만화 원고들이 독자들과 만났고, 그렇게 만화가로 성공한 그 소년들이 도쿄에 집을 사는 시대가 되었다.

절망에서 부활하다

데즈카 오사무는 시대에 뒤처지고 말았다. 애니메이션 사업을 벌이며 재능을 과도하게 쏟아부은 그에게 남은 것은 지친 머리와 나빠진 시력, 허리 통증이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등장한 열혈남아들이 입을 쩍 벌리고 분노를 표현하는 시끄러운 과잉의 만화들을 데즈카 오사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런 만화들을 그릴 수도 없었다. 그가 찍었던 인감도장들은 빚으로 둔갑해 데즈카 오사무를 온종일 빚 독촉 전화에 시달리게 했다. 그런 그에게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후배 직원을 앞에 두고 업무 지시를 하면서 책상 위에 맨발을 떡하니 올려놓고 성냥불로 발가락 사이를 지지며 무좀 치료를 하는 사내. 임협영화에 등장하는 야쿠자처럼 양복 소매에 팔을 넣지 않고 어깨에 걸친 채 두손은 주머니에 넣고 침을 뱉으며 상대방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무서운 사내. 아즈마 히데오의 만화 <실종일기>에도 등장해 아즈마 히데오를 뻔뻔하게 부려먹다가 단물을 다 빨았다고 생각하자 웃으며 절연!을 말하는 악당. 바로 <소년 챔피언>의 편집장 카베였다.

카베 편집장은 데즈카 오사무가 이제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의 마지막을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소년 챔피언>에서 지켜주려고 그에게 연재를 부탁한다.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만화의 길로 들어선 데즈카가 무의식중에 자신의 마지막 만화를 자기가 가지 않은 길인 의사가 주인공인 내용으로 그리겠다고 하자 카베는 1화로 완결되는 단편만화 형식으로 그리는 것을 조건으로 연재 시작을 알린다. 사실 의사가 주인공인 만화는 편집부의 후배 편집자가 공을 들여 준비하고 있는 아이템이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데즈카 오사무의 마지막 작품을 허락한 것이었다. 당연히 후배 편집자는 항의했고 카베 편집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데즈카 만화는 3, 4회 연재하면 끝이야”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데즈카도 몰랐고, 카베 편집장도 몰랐다. 70년대 초, 열혈 주인공들이 과잉으로 무장하고 날뛰는 시대에 의사가 주인공인 조용한 만화가 절망에 빠진 만화가를 제2의 전성기로 부활시키고, 소년만화잡지의 후발 주자로 위태롭게 생존하던 <소년 챔피언>의 생명을 20년이나 연장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만화 <블랙잭 창작비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3, 4회 연재하면 끝이라던 만화 <블랙잭>이 데즈카를 모르던 소년, 소녀 독자들에게 통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고

이후 데즈카 오사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불새>의 장대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고, <붓다>가 탄생했으며, <아돌프를 위하여>를 비롯해 <추락천사>와 같은 위대한 단편만화들이 만들어졌다.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데즈카 오사무는 “어른들은 다들 금방 죽는다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 아침까지는 반드시 완성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말하며 숨어 있던 자신의 재능을 마지막까지 쥐어짜며 만화를 그렸다.

800여 페이지 네권 분량의 <블랙잭 창작비화> 속에는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의 마쓰모토 레이지를 비롯하여 <사이보그 009>의 이시노모리 쇼타로, <데빌맨> <마징가 Z>의 나가이 고 등등 수많은 만화가들이 등장하고, 소년만화잡지들의 수많은 편집자들, 무시 프로덕션의 직원들과 어시스턴트, 애니메이터들, 데즈카 오사무의 아내와 아들까지 등장해 데즈카 오사무에 대해 말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단 한 가지, 마감 시간에 맞춰 원고를 넘기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화 원고지에 코를 박고 그림을 그리는 데즈카와 줄담배를 피우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감 시간 전에 데즈카의 만화 원고를 받아내려는 편집담당들, 철야! 철야! 철야!를 외치며 하루에 두어 시간 쪽잠을 자면서 그림을 그리는 어시스턴트들의 이야기뿐이다. 장장 800페이지 내내 단 한가지 이야기만을 그린 만화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데즈카에 대한 용비어천가쯤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무명의 신인인 원작자 미야자키 마사루와 만화가 요시모토 고지, 두 젊은이는 데즈카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고통을 또박또박 만화 원고에 기록해놓았다. 그래서 800페이지는 재미있는 만화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그 당시 사람들의 처절한 고통의 기록이 되어버렸다. 더욱더 대단한 것은 이 만화의 주인공이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만화 <블랙잭>도 아니고, 데즈카 오사무도 아니며, 그의 어시스턴트들도 아니다. 만화 <블랙잭 창작비화>의 주인공은 데즈카가 누워 있는 병실을 찾아와 마지막 작별 인사로 그의 손을 잡으며 “데즈카는 자신의 편집 인생 그 자체였다”고 고백하는 <소년 챔피언>의 편집장 카베다. 만화의 마지막 권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이 만화는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 무명의 두 젊은 작가는 만화잡지 편집자와 만화가 사이의 피를 말리는 고통의 대가로 탄생한 우정을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