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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리틀 메이저’가 만화에 바친 존경과 애정
오승욱(영화감독) 2016-09-06

이시카와 준 <만화의 시간>

380페이지의 책 속에 약 100편의 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들어 있다. 하드 포르노 만화에서부터 이집트 벽화처럼 촘촘히 정보가 기록된 컴퓨터 소프트웨어 정보 만화, 야쿠자의 역사와 그들의 관혼상제 규범과 예법을 만화로 알기 쉽게 그린 극강의 야쿠자 만화, 난해한 현대 회화 같은 만화, 만화가의 자서전이나 만화잡지 편집자의 회고록까지. <만화의 시간>은 만화가인 이시카와 준이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은 만화 중에서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만화들을 골라 그 만화가 왜 재미있는지를 애정 넘치게 이야기한 만화에 관한 에세이다.

야심을 버리고 난 후의 유유자적과 한가로움

이시카와 준은 일본 만화계의 동료들에게 ‘리틀 메이저’라 불린다. <소년 점프> <소년 선데이> <소년 매거진> 계열의 메이저급 만화잡지에 연재를 한 적도 없고, 메이저에서 연재를 할 정도의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만화를 그렸던 작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포르노 만화잡지, 성인 만화잡지. 네칸 전문 만화잡지 같은 마이너 취향의 잡지에서 독특한 개그만화를 연재했고, 그런 취향을 살려 <액션 라보>라는 만화잡지를 창간했다. 그는 또한 영화배우이기도 하고, 수년간 만화에 대한 에세이를 잡지와 신문에 연재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시카와 준은 자신의 반대편에 ‘빅 마이너’라 불리는 <실종 일기>의 작가 아즈마 히데오가 있다고 하며 ‘빅 마이너’라는 별명이 은근히 부러웠다고 말한다. 아즈마 히데오는 <소년 매거진> <소년 점프>와 같은 메이저급 잡지에서 로리콘 만화, SF 개그만화 같은 마이너 취향의 만화들을 줄기차게 그리다가, 급기야 자신이 그리고 싶은 만화와 편집자가 원하는 만화 사이에서 자신을 소모 시키고 폭발시켜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두번씩이나 가출해 노숙자 생활을 한 작가이다. 이시카와 준은 아즈마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마이너 취향의 만화잡지에서 편집자들의 간섭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며 만화를 연재했지만, 아즈마같이 독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성공을 해본 적은 없다. 그에게는 아즈마의 고통과 기행이 한편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아즈마가 그의 고통과 결핍을 알코올 중독과 가출로 드러내어 자신을 망가뜨리고서도 불사조처럼 재기했다면, 이시카와 준은 엄청난 독서와 재미있게 본 만화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고백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시카와 준은 <소년 매거진>에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 <호모호모 세븐> 세편이 동시에 연재되던 시절에 만화가를 지망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그때에 대해 “휴마는 과연 팔근육이 끊어 지면서까지 ‘대 리그 볼’을 던져야 할까? 죠는 리키시이의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니시는 숨어서 우동이나 먹고 있을 때인가? 또한 아키코 누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우리는 그들이 흡사 실제 인물이기라도 한 듯 매주 흥분했고 학생식당 한구석에 만들어진 마작 테이블에서 그들의 인생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댔다”(<만화의 시간>)고 말한다. 그 시절 이시카와 준의 만화연구회 선배로 훗날 만화가로 성공한 사람이 <침묵의 함대>를 그린 가와구치 가이지이고, <트리플 R>의 작가 혼마 리우이다.

일본 만화의 걸작들이 탄생했던 동시대에 살았으며 만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그는, 만화가 히트해 빌딩을 올리거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대성공과는 거리가 먼 만화가이다. <만화의 시간>에는 이런저런 마이너 취향의 잡지에서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며 살아가는 작가의 가장 좋은 점이 담겨 있다. 아등바등 대단한 것을 만들어보려는 야심을 버리고 난 후의 유유자적과 한가로움이 만화에 대한 글 한편한편에서 넘쳐난다. 성공한 만화가가 못 되었다는 열등감은 만화에 대한 존경과 애정으로 지워버렸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작품을 보는 그릇이 넉넉하고, 그러다보니 넘쳐나는 수많은 만화들 속에서 보석 같은 만화들을 골라내는 혜안이 생겨난 것이다.

만화의 시간, 그 이상의 의미

1997년 <만화의 시간>을 구입했을 때 책에서 소개한 만화 중 내가 보았던 만화는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 <호모호모 세븐>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이후 20여년간 이시카와 준이 재미있다고 소개한 만화들이 차례로 한국에 정식 발매되었다. 연재 초기에 이시카와가 소개해서 작가들에게 힘을 실어준 <베르세르크>와 <전략 인간병기 카쿠고>는 물론이고, 그가 질투하는 유일한 만화가라며 소개한 도리 마키의 <먼 곳으로 가고파>도, <자학의 시>도, <푸른 청춘>도 발매되었다. <잘 있거라. 내 청춘의 소년 점프>(국내 출간명 <만화제국의 멸망>)가 발매되었을 때 한국 만화출판계 기획자들이 혹시 이시카와 준의 <만화의 시간>을 교과서처럼 읽은 게 아닌가 하는 허황된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만화의 시간>의 감동의 라스트는 가지와라 잇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글이다. 이시카와 준은 남성들이 과잉된 에너지를 쏟아내는 남성 취향의 폭력 극화를 썩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지와라 잇키가 왜 평생, 멋있는 한 남자가 다른 멋있는 남자에게 누가 더 강한지 주먹으로 질문하고 주먹으로 대답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만을 줄기차게 그렸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가지와라 잇키의 자서전 만화 <사나이의 성좌>에서 풀릴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죽어버려 더이상 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에 대한 통한을 토로한다. 이시카와가 술집에서 본 가지와라는 늘 혼자 구석진 자리에서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시간이 되면 훌쩍 일어서 가버리는 남자로 기억된다. 물론 그에게 어느 누가 다가가 말을 걸겠는가? 그 흉포한 남자에게.

얼마 전 홍대역 근처의 북새통에 갔다가 속으로 껄껄 웃었다. <만화의 시간>에 <노리개>라는 게이 포르노 만화를 소개한 글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지만 한국에서 <노리개>를 그린 작가의 만화를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만화가 정식 발매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이시카와 준은 <노리개>를 소개하면서 만화를 그린 다가메 겐고로에 대해 게이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된다고 했다. 또 그가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뛰어난 수준의 만화가는 아니라며,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대충 그리거나 복사본을 연이어 붙이는 등 칭찬할 만한 만화가는 아니지만, 주인공과 상대 남자들을 혼신을 다해 그리며 그 속에서 아가페를 구현하고픈 것이라고 했다. 그 후로 다가메 겐고로는 커밍아웃을 하고 20년 동안 그림과 이야기의 실력이 늘어 이제는 여러 나라에서 만화상을 받고 더이상 포르노 만화잡지의 만화가가 아닌 그 분야의 대표 만화가가 되어버렸다. 이시카와 준의 <만화의 시간>은 책 제목대로 만화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그 이상의 의미를 증명하는 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