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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국가대표의 도(道)

<쿨 러닝> <국가대표> <폭스캐처> 등으로 본 국가대표의 도(道)

<폭스캐처>

오래간만에 휴가를 나온 선배는 뭔가 숨기는 눈치였다. 뭐지, 선임한테 구타라도 당하는 건가. 아, 지금은 20세기, 군대 가면 당연하게 맞고 살던 암흑의 시대지. 온종일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던 선배가 소주를 한 사발쯤 마시고야 털어놓은 전말은 이랬다.

소대원 전원의 휴가가 걸린 대회가 열렸다. (자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 군대에서는 포상휴가를 내건 각종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논에서 썰매 타고 휴가 나온 선배도 있었다.) 이번 대회는 한국사 퀴즈 대회, 선배는 명문대 국사학과를 3년이나 다닌 데다 휴학한 지 몇달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병, 승부는 정해졌다. 소대원들은 기뻐 날뛰었다. 이 병사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사 퀴즈 대회의 국가대표급이 아니던가! 엄마, 나 휴가 나가요! 그리고 선배는… 꼴찌를 했다.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도 모자라 왕따를 당하는 중이라고 했다.

<국가대표2>

우리는 침묵했다. 선배는 억울해했다. “우리는 지엽적인 사실에 주목하고 지식을 암기하기보다는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규정하여 현재의 발전을 도모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공부를 하는 거잖아.” 야, 우리가 언제 그런 걸 했어. 나는 했다고. 그렇다면 어디 한번 역사의 흐름을 개괄해보시지. 그렇게 서로를 비난하고 물어뜯으며 그날의 술자리는 저물어갔다.

다른 과라고 해서 사정이 나을 것도 없었다. 중문과 선배는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중국어에는 베이징어와 광둥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망연자실해했다. 학교를 4년이나 다녔는데도 아직 중국어가 안 되는데 하나를 더 배워야 한다고? 저기, 선배는 4년 동안 학교를 다니기만 했잖아요, 학교에서 공부를 했어야지.

이처럼 명색이 국가대표급이라고 하여 그걸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국영수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왔지 국사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며, 엄마 잘 만나서 국가대표 됐지 말을 잘 타서 국가대표… 아니, 이건 다른 문제인가. 어쨌든 나는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국가대표란 무엇이기에 놀고만 먹어도 100년 인생이 짧을 것 같은 사람이 구태여 국가대표가 되고 싶은 걸까. 그들이 매혹된 국가대표의 도(道)란 무엇일까.

그런데 스포츠에는 까막눈이어서 호나우지뉴하고 호날두가 같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나중에 사진 보고 반성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으니, 국가대표는 반드시 선발 돼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사람이 그냥 할 수도 있는 거였다. 이 원고를 쓰느라 평소 멀리하던 스포츠영화를 몇편 봤는데, 국가대표들이 나오는 그 많은 영화 중에 국가대표가 되려는 영화는 거의 없어! 국가대표는 그냥 되는 거고 문제는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딸 수 있는가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어머니도 딸이 금메달 따는게 소원이라 했던가. <페이스 메이커>의 박성일 감독(안성기)도 말했지, 올림픽에서 중요한 건 기록이 아니라 메달의 색이라고.

<쿨 러닝>

하고 싶다고 국가대표 하는 대표적인 영화가 <쿨 러닝>이다.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 타겠다며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데리스(레온)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탈락한 단거리 육상 선수인데, 그래도 올림픽엔 나가야겠다고 우긴다. 그런 그에게 올림픽 선수단 관계자는 말한다, 그럼 복싱이나 사이클로 나가든지. 와, 내후년이 올림픽인데 오늘부터 글러브 끼고 자전거 페달 밟으면 메인 스타디움까지 직행 코스 탈 수 있는 건가요? 내가 몰래 들어가는 아줌마 커뮤니티에선 과학고 가고 싶다는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한테 이제 입시 준비 시작하면 늦었다고 막 뭐라 하던데. 이걸 보면 20세기가 암흑의 시대만은 아니었구나, 그 시절엔 고3 때 입시 준비 시작했지.

하지만 아무나 국가대표하는 대표적인 영화라면 역시 <국가대표>다. 싫다는 사람한테 회유와 협박을 일삼으며 국가대표 시키더니 선수 모자란다고 선수의 동생을 데려다 선수 시키는 이 사상 누각의 결정체. 근데 <국가대표>랑 <국가대표2>는 모두 동계올림픽 유치한다고 병풍 삼은 팀들의 원한이 메아리치는 영화들인데, 동계올림픽 유치하려고 도대체 몇폭 병풍을 둘러친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대표’ 시리즈는 과연 몇편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처럼 국가대표 되는 것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알게 됐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생각만큼은 아니어도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니까. 그순간 <폭스캐처>를 보았다. 레슬링을 하고 싶었지만 말은 품위가 있다며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 덕분에 쫄쫄이 대신 폼나는 승마복을 입어야만 했던 (근데 나도 쫄쫄이보단 승마복 입고 싶은데…) 백만장자가 자기 멋대로 레슬링 국가대표팀을 꾸리는 영화 <폭스캐처>. 부잣집 엄마들은 말을 그냥 좋아하나 봐. 하긴 이십몇년 전에도 말 타고 명문대 들어갔다는 부잣집 딸에 관한 (성은 정씨가 아님) 소문이 있었지.

혹은 이런 걸지도 모른다. <국가대표2>에는 선수들이 출입국 신고서 직업란에 국가대표라고 썼다며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 직업란에 대통령 친구 딸이라고 쓰면 누가 들여보내주겠어, 이민국 끌려가기 딱 좋지.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음, 말을 타면 여러모로…) 1등석으로도 모자라 출입국관리소도 폼나게 통과하고 싶은 그 마음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메달리스트로 승승장구하다가 속임수를 써서 몰락한 <쿨 러닝>의 코치 어브(존 캔디)는 말한다. “금메달은 참 좋은 거야. 하지만 그게 있어도 부족하면 마찬가지지. 언제 충분한지는 결승선을 넘어야 알게 돼.” 그들에게도 결승선이라는 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될 끝이라는 것이 있을지 촛불이 일렁이는 이 밤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종목 선택의 신중함

보람찬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장착하면 좋을 두세 가지 조건

<국가대표>

군 미필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선수(난 까막눈이니까)를 거론하며 친구가 그랬다, 000 어떡해, 메달 못 따서 군대 가야겠네. 그래, 군대란 중요한 것, <국가대표>의 칠구(김지석)도 군 면제 될 수 있다는 말에 낚여서 국가대표가 되지. 군대만 안 갈 수 있다면 나라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 준비해서 대학 갔는데 대학 가자마자 군대 가야 한다면 나 그냥 이 인생에서 나갈래.

<페이스 메이커>

스포츠 정신

평생 다른 선수들 뒤치다꺼리만 하던 <페이스 메이커>의 마라톤 선수 만호(김명민)는 처음 나가는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스포츠 정신”을 발휘해 은메달을 딴다.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자 허벅지를 찔러 피를 내면서 달리는 만호에게 보내는 찬사가 그놈의 “대한민국 스포츠 정신”. 이게 스포츠 정신이라면 스포츠 무서움. 학교도 안 보내면서 곱게 키운 아가씨가 도대체 왜 스포츠를 한 걸까 다시 한번 의문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차라리 수를 놓지, 굿할 때도 쓰게.

<쿨 러닝>

희귀 종목

<쿨 러닝>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근본도 없이 국가대표가 되려면 종목을 잘 골라야 한다. 단거리 육상 선수는 선발전을 통과해야 하지만 봅슬레이 선수는 자기가 하고 싶으면 국가대표 하잖아? 1990년대에는 말 타고 명문대 들어갔다, 요트 타고 명문대 들어갔다 등등의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 공통점은 자기 말이고 자기 요트라는 거였다. 그리고 말과 요트는 모두 비싸지. <페이스 메이커>의 육상 선수들도 비싼 운동화를 신기는 하지만 설마 요트 한대짜리 신고 달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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