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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인> 개봉 앞두고 무협영화 준비중인 감독 이경영
2002-04-03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감독의 길을 간다”

1998년 <키스할까요> 이후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이경영이 햇수로 5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무협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가 96년 <귀천도>에 이어 선보이는 두번째 연출작 <몽중인>은 의외로 가족영화다. “평생 당신 아들이 배우이길 바랐던 노모가 ‘이 감독’이라고 부르셨던 순간, 아! 진짜 감독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는 감독 이경영에게 물었다.

첫 시사를 마쳤다. 개봉을 앞두고 평가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나.

사실 내 작품의 단점도 장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평가가 두렵진 않다. 오히려 담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건 조금이나마 바란다. 음, 좀더 열심히 하면 세번째 영화 할 수 있겠다, 그 정도? (웃음) 물론 이런 소재의 영화가 요즘 영화계의 흐름에 발맞출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있었다. 하지만 요즘 관객의 취향에 맞지 않을지라도 누군가 해야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보면 감성적으로 많이 치우친 영화를 선택한 데는, 작지만 말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던 거고 그것을 말하기에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류에 편승해서 만든 영화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소망’인가.

엔딩자막에도 있지만 우리 아이들이 최소한 엄마, 아빠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냐, 하는 거다. 아이들이 푸르른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는 건 싫다는 거다.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된, 그리고 영화화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실제 주변에 극중 딸, 유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이도 있고,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지난해 작품 들어가기 전에 만난 혈액암 걸린 아이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많이 지쳐 있었는데 오히려 아이는 생사로부터 초월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받아들인 듯한 그 어린아이 같지 않은 깊은 눈매를 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주제를 사회에 호소력 있게 전달하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저 이야기는 맞다, 하는 생각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고 거기에 영화라는 수단을 빌린 것뿐이다. 물론 영화가 질적으로 뛰어난 데다가 메시지까지 잘 전달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영화가 어떤 말을 하고자 했던가는 전달되길 바란다. 영화 본 기자 몇분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랄까 안도 같은 걸 가졌다.

결국 <몽중인>은 죽어가는 어린 딸 유메(夢: 일본어로 꿈이라는 뜻)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 감독의 모습도 유메에게 가장 많이 투영된 듯하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

죽음을 앞둔 아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럽다. 그런 아이 모습을 세상에 더 붙들어놓으려고 하는 어른들 모습이 오히려 더 아이 같다. 솔직히 11살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죽음 직전에 세상을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한 사람에 대한 접근이었다. 유메는 어른들의 이기심마저 다 받아주는 사랑의 원형 같은, 어머니 같은, 물 같은 존재다. 정말 필요한 존재인데 잘 못 느끼는 그런 존재.

<귀천도>를 끝내고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어려움과 기술적인 한계에 대한 어려움을 말했다. 당시 보완점이라고 생각했던 점들이 두번째 작품을 통해 많이 극복된 것 같나.

드라마트루기, 논리성 결여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안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작업하면서 내 나름대로 철이 들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콘티뉴이티에 대한 개념이다. <귀천도> 찍을 때는 답답했었다. 이 컷에서 다음 컷 넘어가는 게 늘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작업하면서는 그런 답답함은 많이 줄었다. 콘티뉴이티에 대한 여유가 생겼달까. 주관에서 객관으로 빠져나와 바라보는 훈련들을 하다보니 좀더 멀리서 바라보는 시각을 배운 것 같다. 물론 그게 잘되면 휼륭한 감독이 되겠지. (웃음)

아들이 이제 5살이 되었나? 예전 인터뷰에서 아이를 위한 영화를 만들어 ‘파더스 컷’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는데 <몽중인>을 보면 정말 아이에게 바치는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달에 한번씩 만나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 개인적으로 내가 살면서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반성문 같은 영화다. A4 한장이면 될 반성문에 너무 돈을 많이 들였지만…. (웃음)

차기작으로 무협영화를 준비중이라고 들었다.

<검향만리추>라는 무협영화다. 시나리오는 거의 다 썼고 올해 제작에 들어갈 것 같다. 지금은 내 이야기를 카메라 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에너지가 더 많다. 무협인데 얼마나 신나겠나. 나는 칼만 쥐어주면 신이 난다.

마흔두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경영은 만년 소년 같은 사람이다. 이 말은 그에게 칭찬도 되고 비난도 된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는 ‘소녀취향’의 감성이 영화의 습도와 온도를 높이지만 결국 같은 이유로 영화에 대한 평가는 유보되기도 하니까. 16년의 베테랑 배우 이경영에게, 결혼과 득남 그리고 이혼이라는 극적인 사건들을 너무 한순간 끌어안아야 했던 인간 이경영에게 물었다.

나이드는 게 싫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몽중인>을 보고 있으면 감독 스스로가 정말 성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진짜 그렇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어른이 싫다. 어른들은 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 말에 대한 손익을 따지게 되고 다분히 사는 방편의 말들이 많다. 어렸을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내일 어떻게 돈을 벌까가 아니라, 내일은 또 아이들하고 어떻게 놀까 하는 걱정만 했던 시절. 순수하고 솔직하고 눈치보지 않아도 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영화를 쉬는 사이 무리한다 싶을 만큼 드라마를 찍었다. 요즘같이 배우들의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쓰는 시대에 일일극 같은 경우엔 심하다 싶을 만큼 망가졌고, <은실이> <푸른안개>는 실제보다 아주 나이가 들어버리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이혼하고 두려움이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SBS 드라마만 나가면서 공간적으로 나를 고립시키려고 한 것도 있었다. 공인으로서 많은 하객들에게 잘살겠다는 약속을 배신한 것에 대한 미안함, 특히 영화쪽 사람들 만나는 게 두려웠다. 하객의 98%가 영화쪽 사람들이었으니까. TV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겐 덜 미안할 것 같았다. 물론 정말 망가지는 역할을 하더라도 조건을 내건 게 있다. 나 혼자만 출연하는 건 아니고 일자리 없는 내 후배들을 끼워넣어달라는 거였다. 그 정도라도 내가 해주는 게 그 시절 내 존재에 대해 스스로 자위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소모적인 촬영에 많이 지쳤을 것 같다.

지치기도 했지만 오히려 많은 공부가 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연기해야겠다는 생각. 계산하지 말고, 때때론 생각이 연기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 생각조차 막아버리자. 아르바이트로 <연산일기>를 시작할 때 유인촌 선배가 했던 말이 그제야 받아들여졌다. 카메라 앞에 서기까지 최대한의 이성을 동원해서 캐릭터에 접근해라,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섰을 땐 네가 준비했던 이성적인 부분을 버려라, 몸이 움직이는 대로, 바로바로 느낀 그대로 연기를 해라, 고 했던 말. TV연기는 생각할 긴 시간이 없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나를 비워내는 데 좋은 훈련장이 되었다. 그런 것들이 풀려나온 게 <푸른안개>였던 것 같다. 표민수 PD와 둘이 앉아서 ‘드러나지 않지만 생각이 나오게 하는 연기, 호흡이 느껴지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만족하는 만큼 힘든 작업이었다. 기도 많이 빼앗겼다.

그러다가 드라마 출연을 그만두고 영화로 발길을 다시 돌렸다.

그저 나에게 가장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로의 복귀일 뿐이다. 내 마음속에 떠나지 않았던 것, 젊은 시절의 열정, 그 속에서 만났던 수많은 인연들,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자하는 생각들이 생겼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 적극적이었다. (웃음) 내가 나를 캐스팅하고 내가 레디 고, 하는 상태로 만났으니….

데뷔작인 <연산일기>가 87년이니 벌써 배우생활 16년째다.

아휴, 벌써 그렇게 됐나? 16년 동안 뭐해놨나….

특별히 구애받지 않고 다작을 하는 편이고 뚜렷한 역할에 대한 욕심보다는 배우로서 사는 삶, 그 자체를 중요시 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1, 2년 하고 말게 아니니까. 물론 언젠가 나도 빛나는 모습의 배우로 서 있고자 하는 욕심은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얻은 자리에 대해서 몸사리고 조급해 하면 더 많은 걸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작품을 사려가면서 고른다. 물론 좋은 안목이기도 하고 좋은 선택이기도 하지만 최고를 달리고 있는 배우들이 가끔은 병살타도 쳤으면 좋겠고, 데드볼도 맞았으면 좋겠다. 자기 흠집을 갖고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 흠집 자체가 더 영화적인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게…. 지금 배우들은 흠집이 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다. 몇몇 친구들이 나오는 작품만이 좋은 작품처럼 돼버렸고, 개인적으로 배우들이 더 많은 감독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저 좋은 배우로서 남고자 하는 욕심은 없었나. 배우로서 이루어놓은 것도 많고 감독이 오히려 흠집이 될 수도 있고, 모험일 수도 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살지 왜 또 그 어려운 길을 가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정말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감독이라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라고 봐주면 편할 텐데 말이다. 아마 내가 카메라 뒤에서 전체를 보는 일을 안 했다면 배우로서 지금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감독이란 직업보다 더 큰 건 삶일 게다, 감독들도 영화 만드는 작업을 통해 하나하나 삶을 완성해나가듯이 나 역시 이런 연출작업이 배우로서의 삶을 완성해나가는 거다. 혹시 아나? 어느 날 철들어서 정말 좋은 작품, 문제작을 한편 만들어서 그래 너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는 얘기 듣는 날도 있겠지. 확실한 건 이렇게 끝낼 순 없다는 거다. 카메라 뒤에서 전체를 책임지는 모습이 이 정도 상태에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개인적인 ‘철든 완성’을 위해서라도 다시 도전할 것이고 그 도전이 앞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갈 거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나.

어느 날은 이 모든 것을 손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냥 촌부로 돌아가고 싶은… . 표현해낸다는 것, 창작을 해야 한다는 게 어쩌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저 나는 운이 좋게도 내 표현을 너그럽게 봐주는 시간 속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사람들이 내 진짜 재능과 열정을 한번도 보지 않고 박수 쳐주는 게 거짓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 나는 그저 작은 술집주인이었으면 좋았을 거야. 일산에서 제일 독특한 술집 주인. 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