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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윤태호의 <파인>
오승욱(영화감독) 2016-12-08

윤태호의 <파인>.

전라남도 목포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 달리면 나오는 신안 앞바다에 건져올리기만 하면 돈이 되는 노다지가 묻혀 있다. 서울에서, 전라남도 광주에서, 부산에서 도굴꾼들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범죄자들이 목포로 모여든다. 악인들이 한줌 돈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며 수 싸움을 벌인다. 게다가 건달들이 모여드니 술이 빠질 수 없고, 술에는 안주가 따라간다. 미식의 고장 목포이니 이들이 먹는 음식들도 대단한 볼거리다. 바닷속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과 서울, 광주, 부산의 악인 총출동. 여기에 음식까지. 어마어마한 진수성찬이 윤태호의 만화 <파인>에 담겨 있다.

악당들이여 목포로 가라

1970년대 중반, 신안 앞바다에서 어부들의 그물에 그릇이 하나 걸려 나온다. 어부들은 그릇이 그물에 걸리면 재수가 없다고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중 한 어부가 그릇을 집에 가져왔고 학교 선생이던 어부의 동생이 보상금을 탈 요량으로 군청에 그릇을 가져가 신고한다. 중국 송나라의 배가 일본으로 가다가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고, 침몰한 송나라 배 안에는 일본으로 보낼 최고 품질의 도자기가 한가득 있었다. 그물에 걸려 올라온 그릇을 서울에서 온 누군가가 고가로 사들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무렵, 정부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하고 전국의 골동품상들과 도굴꾼들이 신안 앞바다에 눈독을 들이는 무렵, <파인>은 시작된다.

바닷속에 돈 덩어리가 묻혀 있고 먼저 꺼내는 놈이 임자다. 일확천금의 기회이니 전국의 악당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신안 앞바다의 물살은 배를 침몰시킬 정도로 매섭고, 바닷속은 온통 펄이라 시야가 확보 안 되며, 30m 이상을 잠수해서 꺼내야 하는 데다 경찰 감시선에 걸리면 감방행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국의 악당 중 서울팀을 소개하자. 주인공 오희동은 어릴 때부터 삼촌 오관석을 따라다니며 범죄의 길에 들어섰고, 소년원과 교도소를 다녀와 남들이 하는 변변한 일은 할 수 없는 전과자 신세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삼촌 오관석은 하는 일이 일정치 않은 자인데 쉽게 말하자면 범죄건 뭐건 돈이 되면 뭐든지 일을 도모하고 사람을 구해 추진하는 범죄 공사판의 십장이다. 아홉살 때 피난 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못 배우고 가난한 그가 살 길은 요령을 부려 이리저리 꾀를 내어 돈을 버는 것이었으니, 오관석은 살인을 한 후 조카에게 “우리가 사람을 죽이려고 이 일을 했는가? 아니다. 삼일빌딩을 보라. 경부고속도로를 보라. 사람 죽이려 공사를 시작했는가? 아니다.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사람이 죽고 다친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은 사람 생각해서라도 일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젊었을 때는 힘닿는 데까지 돈을 벌고 늙어서는 참회하면서 살면 된다”고 뻔뻔하게 말한다. 그들 뒤에는 삼팔따라지 출신에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자수성가한 기업 총수인 천 회장과 그의 재산을 먹으려는 경리 출신의 젊은 아내가 있고, 구렁이 열 마리는 뱃속에 들어 있을 인사동 뒷골목의 골동품상들이 있다.

다음은 목포팀. 뱃사람인 황 선장. 그는 선장은 아니지만 선장 행세를 하며 남의 배를 끌고 나가서 돈을 벌고 선장이라 불러주면 좋아하고, 동네 양아치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는 자다. 범죄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범죄자가 아니라 할 수도 없는 거친 사내다. 배에 아주 쪼끔 난 칼자국을 내보이며 호랑이띠 호랑이시에 태어났으니 나는 호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짜 냄새 나는 중고품상 하 선생은 허세만 부리는 하수 중의 하수이다.

나머지 팀은 부산 도굴꾼 김 교수와 “털어뿔까?”라며 나중에 합류한 부산 출신의 범죄 가족 또는 조폭 일가. 90년대 뉴스에서 보던 커다란 덩치의 전형적인 조직폭력배의 외양을 한 부산 범죄 가족이다. 서로의 호칭을 보면 가족인 것 같고,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으며, 프로 레슬러 김일이 역도산 밑에서 매일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맞으면서 훈련했다는 확인 안 된 전설을 이야기하며 구타가 곧 레슬링 훈련인, 무식하고 미개한 짓거리를 숙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캐릭터들이 모두 머릿속에 더럽고 비열한 생각들만 가득 차 있고 허세에 절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부산 출신 범죄 가족은 가공할 만하다. 그들은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그릇들이 값어치가 나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털어뿔까?” 하고 실행에 옮긴다.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모든 것을 가지려는 최악의 인간들이다. 목포 건달들에게 돼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부산 건달은 주변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시비를 턴다. 그의 허세는 매를 맞아도 별것 아니고 날 건들면 너희는 “다 죽었어”다.

악당들의 스폰서인 그릇을 탐내는 재력가들은 모두 자수성가한 삼팔따라지들이거나 1·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온 이북내기들이다. 부산 패거리들이 목포로 오는 계기를 만들어준 자도 우악스런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재력가이고, 서울내기들의 전주 역시 이북내기들이다.

윤태호의 <파인>.

남도의 진수성찬 같은 만화

1970년대 서울, 목포, 부산의 거리 풍경을 세심하게 묘사한 것도 이 만화의 볼거리지만 역시 백미는 좆밥 인생들의 술상과 안주들이다. 주인공 오희동과 오관석이 단칸방에서 아이들과 아내가 자고 남는 방구석 빈자리에 막걸리를 받아놓고 안주로 먹는 것은 열무김치의 무 꽁다리. 그것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장면을 보면 침이 꿀떡 넘어간다. 악당들이 모인 목포는 한창 병어철이다. 목포 황 선장과 서울내기들의 첫 술상 안주는 구운 병어인데 황 선장은 생선 대가리까지 바싹하게 구워달라고 하여 병어 대가리를 버쩍버쩍 씹어먹는다. 물질하는 잠수부들은 간식으로 병어를 두툼하게 가로로 잘라 코가 뻥 뚫릴 만큼 잘 익은 김치에 둘둘 말아먹는다. 식당을 찾은 부산 돼지에게 목포 아줌마가 “경상도에서 오셨나? 글면 뭐를 주로 드시나” 하면 돼지는 “여가 경상도요? 여서 파는 거 주소” 하고 아줌마는 “병어나 드씨요” 한다. 돼지가 “전라도는 보해인가?” 하자 아줌마는 “전북은 백화, 전남은 보해. 전라도라도 엄캉 달라요” 하며 보해소주를 내주고 돼지는 “달다 달어” 하며 사홉들이 소주를 열댓병 깐다.

윤태호가 묘사하는 서울, 전라도, 부산 남자들의 허세와 비열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2016년 초 겨울, 만화 속 70년대 악당들이 조금도 변한 것 없이 살아남아 지식과 권력의 옷을 걸치고 업그레이드하여 신안 앞바다가 아니라 서울 청와대에 모여들어 국민의 세금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가로채려 저지른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수작들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

60년대에 태어난 전라도 광주 출신의 작가 윤태호는 어릴 때부터 보았던 악당 삼촌들과 악당 이모들을 체내에 묵혀두었다가 잘 곰삭아서 콤콤한 냄새가 솔솔 피어나자 그것을 꺼내어 양념을 쳐서 차려놓았다. 만화 <파인>은 전라남도 광주의 어느 골목을 걷다가 그냥 쓱 들어간 소박한 백반집에서 최고의 맛을 느꼈던 그 옛날의 만족감을 선사하는 진수성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