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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백승화의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 드디어 찾았다 인생영화
백승화(영화감독) 2016-12-14

집에 처음 비디오플레이어(VCR)가 생긴 초등학생 무렵. 드디어 친구집이 아닌 우리집에서도 <후레쉬맨>을 실컷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떴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마음껏 대여하기엔 용돈이 부족해서 사실상 VCR은 장식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VCR 구입 당시 사은품으로 받아 늘 함께 장식되어 있던 재미없어 보이는 외국영화 테이프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1986)라는 제목의 프랑스 코미디영화였다.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심심할 때마다 시큰둥하게 한두번 플레이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 보다보니 몇번씩 돌려볼 정도로 이상한 재미가 있었다. 프랑스어의 묘한 매력처럼 영화에 빠져든 첫 번째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수많은 추억 속 비디오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내게서 자연스레 잊혀져갔다.

이후 삐로롱, 20년 뒤.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내 인생의 영화’를 꼽아달라는 질문을 가끔씩 받을 때마다 딱히 떠오르는 영화가 없다고 얼버무리곤 했지만, 몇년 전 문득 이 영화가 있었다는 걸 떠올리곤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랄 정도로 기뻤다. 마치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하기엔 지금의 내 취향을 너무나 정확히 저격했다.

프랑스어로 ‘도망자들’(Les Fugitifs)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출소한 뒤 새 삶을 다짐하고 은행에 통장을 만들러 간 전직 유명 은행털이범 루카(제라드 드파르디외)가 실어증에 걸린 딸 잔느(아나이스 브렛)를 위해 은행을 털게 된 초보 은행강도 삐뇽(피에르 리샤드)에게 인질로 잡히게 된다는 엉뚱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관계의 세 사람이 도주하며 겪는 사건과 우정을 그리는 이 작품은 영화 내내 웃기고 싶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김빠지는 유머와 다급하면서도 느긋한 나름의 서스펜스가 담겨 있고, 무엇보다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범죄 이야기였다!

내가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는 단지 옛 추억이 담긴 영화가 떠올라서라기보다, 내가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시네필도 아니고 학교든 기관이든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라서 스스로 근본 없는 연출자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알고 보니 내게도 손톱만 한 근본 비슷한 게 있었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던 것 같다.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시작의 근거가 자신도 모르는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아졌다. 영화 내내 따스한 위로처럼 스며드는 블라디미르 코스마의 O.S.T와 함께 말이다.

‘내가 왜 영화를 하고 있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꺼내 보고 싶어지는 고향 같은 영화. 언젠가 내가 만든 영화도 누군가의 시작에서 작은 근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그런 영화가 내게도 있다. 왠지 기뻤다.

백승화 영화감독. <걷기왕>(2016),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09)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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