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trans x cross
[trans x cross] “독자의 잠들어 있던 영혼을 자극하길, 그럴 수 있길…” -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펴낸 황인숙 시인

황인숙 시인은 휴대전화가 없다. 집전화로 몇번의 시도 끝에 통화에 성공했다. 통화 말미, 시인과 다시 한번 약속의 그날을 확인하고 나니 둘만의 공모일이라도 정한 듯 간질댔다. 게다가, “건강하세요!”라는 시인의 명랑한 끝인사라니. 대설(大雪) 오후. 시인이 30년 넘게 산 해방촌의 한적한 카페에서 시인을 기다렸다. 창 너머로 시인이 보인다. 곱슬곱슬한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잰걸음을 옮긴다. 2007년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 이후 9년 만에 펴낸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를 가슴팍에 팍! 껴안고서 시인이 왔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한 이후 일곱 번째 시집이다. 등단작이 시인의 미래를 예고했을까. 시인은 고양이들과 함께 살며 길고양이들을 돌보고, 고양이에 대한 시도 써왔다.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결국 시를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을 시인의 지난 시간에 대해 물었다. 더불어 최근 한국 문단의 참담한 일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전한다.

-오랜만의 시집이다. 90편이 실려 꽤 두툼하다.

=4년 전부터 시집으로 묶어야지 했는데 그때 내지 않길 잘했다. 지금이니 그나마 좀 읽어볼 만하고 조금 덜 부끄러운 시들이다.

-그간 써둔 시들이 많지 않겠나. 추리고 또 추렸을 텐데.

=시를 열심히 쓰지 못해 추리지도 못했다. 시 쓴 노트를 들여다보니 이건 뭐 콩트도 아니고 시도 아닌. ‘어휴, 뭐, 어차피’ 그러면서 다 넣었다.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라면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너무 후했던 거다. 그런 시들을 뺀다고 시집의 가치가 월등히 올라갈 것 같지도 않고. 꽃다발에 꽃송이 말고 다른 잎가지들도 많구나, 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조재룡 문학평론가는 명랑과 우수를, 고종석 작가는 연민과 리듬(과 나이듦, 추억, 탐미, 권태, 유희)을 당신의 시에서 읽어낸 바 있다.

=웃기는 글, 웃기는 영화, 웃기는 얘기를 정말 좋아한다. 몇년간 <일요신문>을 사봤다. 유머 코너가 어찌나 재밌던지. 근데 그 코너가 사라져버려서 신문을 사볼 맛이 안 난다. 세상도, 나 자신도 칙칙하니까 밝고 명랑한 게 좋다. 근데 내 시, 특히 이번 시집은 왜 이리도 우중충하고 칙칙하고 슬픔뿐인지.

-‘이런, 이런,/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갱년기>)처럼 ‘고적한 포기’가 있는가 하면,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송년회>)나 ‘고양이들아, 너희 핏줄 속 명랑함을 잃지 말렴!’(<길고양이 밥주기>)처럼 명랑함을 향한 외침들이 엿보인다.

=그렇게 읽혔다면 다행이다. 이런 시, 저런 시를 써봐야지 하는 여유가 내겐 없다. ‘열심히 써야지’만 있는데 그렇게 못해 스스로 채무감만 쌓였다. 명색이 시인인데 이렇게 게으를 수가. 인터뷰 나오기 전에 둘러보다 그제야 한달 가까이 건드리지 않았던 작업용 노트북이 보이더라. 뭘 쓰든 노트북을 그렇게 오래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또 한번 했다.

-<생활의 발견>에서 ‘시작법은 시의 소스/ 제 소스의 레시피를 가진 시인들이 부럽다’고 했다. <리스본行 야간열차>의 ‘시인의 말’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써뒀는데.

=시인이 자기 시의 방법론을 갖고 있는 건 튼튼한 틀이 있다는 거다. 시 쓰기는 매번 한 글자 한 글자 새로 시작하는 일이다. 청소년기부터 꾸준히 문학 공부를 한 사람은 모티브가 들어오면 어떤 소재든 시로 만들어낸다. 내게도 그런 기본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번 시집의 <일몰> <애가> <불시착> 등에는 죽음의 심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누구나 죽기에 죽음이 특별하진 않다. 죽음은 저마다의 고독한 행사겠지. 그럼에도 누군가의 돌봄이나 바라봐주는 시선 하나 없이 각별히 더 고독한 죽음도 있다. 나는 연고 없는 길고양이들의 죽음에서 그걸 느낀다. 그러고보니 죽음이 만연한 이 사회에 대한 시는 미처 못 쓴 것 같다. 그래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내게 작용했을 거다. 시를 알차게 못 쓴 건 내가 게을러서고. 청탁이라도 없었으면 쓰지도 못했을 시들이다. 그 정도로 게으르니 창피한 일이다. 아니, 면목 없다.

-‘게으르다’는 건 시 쓰는 물리적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 이상의 어떤 태도의 문제라고 보는 건가.

=밤마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하다며 멍하게 있거나 당장 읽지 않아도 될 추리소설이며 잡다한 책들을 읽어치우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주 나쁜 습관이다. 피곤하면 얼른 자고 다음 날 반듯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게으름이 일상이 된 게 문제다. 정신을 차리고 시를 내 삶의 중심에 놔야지 떳떳할 수 있을 텐데.

-시는 언제 쓰게 되나.

=(웃음) 데드라인을 안다는 게 문제다.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옛날에는 메모해둔 것들을 뒤적거렸는데 이젠 뒤적일 메모조차 없다.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 써두지 않았나. ‘인생 총량의 법칙? 그렇다면 앞으로는 시를 끝내주게 쓰는 날이 남은 거지!’라고. (웃음)

=변명 겸 또 그렇게 말해놓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

-‘고양이 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양이에 대한 시가 많다. 실제로 고양이 세 마리(란아, 보꼬, 명랑이)와 함께 살고 길고양이들을 돌본다.

=고양이 얘기라면 무궁무진하다. 고양이 덕분에 따뜻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나라 길고양이들은 매일 가슴 무너지는 일을 겪는다. 고양이와 첫 연을 맺은 건 20년 전쯤이다. 살던 집의 뜰에 고양이가 있는 걸 보고 음식을 나눠준 게 시작이었다. 10년 전부터는 매일 밤 고양이들 밥을 챙긴다. 이젠 여행도 마음대로 못 간다. 고양이 밥을 주는 동네의 반경? 좀 넓다. (웃음)

-등단작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의 제목을 나름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이 소망은 유효한가.

=제목 때문에 팔자가 이렇게 됐나보다. 그땐 오히려 내가 길 위의 개나 고양이처럼 살았으니까. 우리나라 길고양이로 태어나는 건 절대 원치 않는다.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됐다. 지난 11월 말 한국작가회의는 ‘한국작가회의 징계위원회’(가칭)를 구성해 피해자 제보를 적극적으로 받고 가해 문인에게 징계 조치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작가들은 ‘문단 내 성폭력 방지’ 서약 등을 이어가는 연대의 장으로 ‘페미라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오랫동안 활동해온 시인으로서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나.

=무참하다. 문인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겠으나 그럼에도 누군가는 문인이기에 더 아름답게 살줄 알았다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문인으로서 과분하다 할 만한 존중을 받은 건데 그런걸 어그러뜨렸으니. 지금이라도 이 문제가 드러난 건 정말 옳다. 문단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 나아가 정부 차원에서 성차별을 없애고 성평등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한다. 인식을 지지해줄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고. 여성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갑질’이 문제다. 이 사회가 인간관계를 착취하는 쪽으로 체질화된 게 아닐까. 어떤 이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자기 추함을 모를까. 자기와 관계된 사람들이 행복하길, 잘되길 바라야지 자기와 인연이 닿아서 불행해지고 피해를 본다면 이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타인에게 해가 되고 불쾌감을 주는 건 내 자존심 문제라는 의식이 당연해져야 한다. 문인들도 병든 사회의 영향을 받겠지만 그럼에도 문인들은 좀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술가이기에 받는 사회적 혜택이 있지 않나. 그렇다면 불이익도 감수해야지. 더 정당하고 더 아름다워야 한다. 문인은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악과 추함에 천착해야겠지만 그건 글과 예술로서의 천착일 거다. 자기 삶에서도 그러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자기보다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향한 폭력과 혐오의 감정이 일상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100명의 남성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100만명에 한명이라도 여성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안 될 일이다. 직접적인 가해는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이런 것도 안 된다. 여성들이 드세져 무섭다고 하는 남성도 있는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드세질 수밖에 없다. 부당하게 빼앗긴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이 문제 앞에서는 조심 또 조심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학은, 또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 힘을 잊고 살 때가 있는데 백이면 백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시를 쓰는 그 순간만이라도 자기의 생각으로 글을 쓰지 않겠나. 시을 읽는다는 건 독자가 작가의 그런 생각을 읽으며 자신에게도 정신과 영혼이 있다는 걸 각성하는 일이다. 독자의 잠들어 있던 영혼을 자극하길, 그럴 수 있길 바라는 수밖에.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시인은 <씨네21> 독자들에게 이번 시집에서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의 한 구절을 권했다. ‘차라리 얼른 저버릴까/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 가슴 저미네/ 영원히는 뛰지 못할 내 가슴.’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을 한) 상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그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이유였다. ‘보고’도 외면해버렸던, ‘저버림’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차가운, 고적한 포기를 생각하면 울음이 차오른다’고도 했던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