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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아즈마 히데오 <실종 일기>
오승욱(영화감독) 2017-02-09

읽다보면 입에 침이 고이고 온몸이 근질거려 벌떡 일어나 술집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만화들이 있다. <술 한잔 인생 한입>이라든가 <술꾼도시처녀들> <와카코와 술> 같은 만화들이 그렇다. 만화에서 소개한 술집을 검색하고 주당 멤버를 모아 만화에서 보았던 군침 도는 안주와 술을 만화의 주인공 와카코처럼 “푸슈! 푸슈!” 입으로 소리를 내며 부어라 마셔라 하고는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기어들어오게 된다. 다음날 늦은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그 아름답던 만화책들은 다시는 펼쳐보기도 싫어져 구석에 처박아버리고 숙취 때문에 끙끙 앓으며 “술을 다시 마시면 난 개다!”라고 중얼거린다. 뭐, 2~3일 지나면 다시 개가 되어 멍멍 짖겠지만. 운이 좋아서 그날 저녁쯤 숙취가 좀 진정된다면 또 다른 종류의 술에 관한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나 약간 하드한 <알코올 중독 원더랜드>를 보면서 전날 술 마시고 저지른 만행과 추태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불 속에 숨어버린 자신을 “아직은 괜찮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이 저지른 만행에 비하면 넌 아직 풋내기 수준이야” 하며 위로한다. 그러나 그런 날들이 되풀이되고 되풀이되어 어느 날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오후 3시쯤 필름이 끊기고 다음날 새벽 5시에 잠이 깨어 화들짝 놀라며 지갑을 뒤져 내가 어제 무엇을 했는지 영수증으로밖에 행적을 추적해볼 도리가 없는 날에 이르렀다면 아즈마 히데오의 만화 <실종 일기>의 주인공과 비슷해진 것이니 정신 차리고 술을 멀리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

썩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을 퍼마시고 파렴치하게 세상을 종횡무진 누비며 폐를 끼치는 문학 작품들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소년, 소녀들이 주 고객인 만화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퍼마시며 난동을 부리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은 많지 않다. 게다가 갑자기 모든 연재를 중단하고 만화계에서 사라져 궁금증을 자아내는 화젯거리가 되었다가 차츰 만화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작가가 10여년이 지나 그 당시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들고나온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다. 아즈마 히데오의 <실종 일기>가 바로 그런 만화다.

90년대 말 일본 만화업계 사람들은 사건의 내막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지만, 일반 독자들은 아즈마 히데오가 왜 연재 중이던 만화들을 모두 그만두고 사라져버렸는지, 사라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시기 이시카와 준은 칼럼에서 아즈마 히데오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그의 만화 한편을 소개한다. 만화의 제목은 <밤의 물고기>. 이시카와 준이 고른 만화의 한컷에는 아즈마 자신을 모델로 그린 주인공이, 온몸이 아이스크림 녹듯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옆에 앉은 이상한 생명체를 보며 “저 녀석 썩고 있는 것 아냐?”라고 말한다. 이시카와 준은 아즈마가 사라진 일의 진상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며, 개그 만화는 공을 들여 그리면 그릴수록 독자는 줄어들고, 재미있다 생각하는 것을 그리면 그릴수록 만화는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광기에 가까워진다는 말을 하며, 그것을 견디지 못한 개그 만화가들은 결국 정신이 피폐해져 쓰러져버렸다는 이야기를 한다. 7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개그 만화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리고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낸 <마카로니 봉련장>의 가모카와 쓰바메가 그런 경우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광기에 가까운 개그 때문에 성공했지만 광기를 넘어선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절망하여 사라져버린 케이스였다.

아즈마 역시 그렇게 썩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술을 마시는 것으로 도망치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했었다. 당시 만화업계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고 10여년이 지난 후 부활했다. 그가 사라져버렸을 당시에는 썩어가고 있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만화를 그렸지만, 이번에는 썩어가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그려버렸다.

노숙자이자 알코올 중독자이자 만화가

만화 <실종 일기>는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만화 잡지사 편집실에서 회의를 하던 중 “담배 좀 사가지고 올게요”라고 말하고는 그길로 도망쳐 노숙자 생활을 하는 이야기가 첫 번째 파트인 ‘밤을 걷다’이다. 괴로운 이야기라 리얼하게 그리면 그리는 사람도 괴롭고 보는 사람도 괴로우니 가능하다면 웃으면서, 라며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데 입은 웃고 있는 주인공을 그린다. 하필이면 겨울에 집을 나와 온갖 고생을 하며 주택가 뒷동산에 썩은 이불로 아지트를 만들고 음식점 쓰레기봉투를 뒤져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주인공을 보다보면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첫 번째 파트의 끝은 ‘오늘은 좀더 먼 곳까지 가서 식량을 확보해볼까나’ 하며 시내로 들어갔다가 경찰관에게 잡히고 경찰서에서 로리콘이라고 인정받는 형사가 그를 알아보고는 집으로 귀가 조치되며 끝난다. 두 번째 파트는 또다시 머리에서 시커먼 구렁이 또는 지렁이가 기어나와 집과 일에서 도망쳐 경험자답게 좀더 유유자적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너무 놀았으니 일을 해볼까 하며 배관공이 되고 또 일을 하다보니 만화가 그리고 싶어져 만화를 그려 가스회사 사보에 응모하고 그러다 아내와 아들에게 붙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인 ‘거리를 걷다’이다. 이 파트의 끝에는 아즈마의 만화 인생 총결산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싶은 만화와 독자와 편집자가 요구하는 만화 사이의 불화. 먹고살기 위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개 숙인 수많은 날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여섯 페이지에 걸쳐 꽉꽉 담겨 있다. 이것은 다음 파트의 예고편이자 답안지가 된다.

세 번째 파트는 ‘알코올 병동’. 알코올 병동에 모인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다수 출연하여 진풍경을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집에서 먹기에는 아내에게 눈치가 보이니 취재를 한다는 구실로 집을 나와 떨리는 손이 창피해서 자판기에서 술을 뽑아 먹고 그러다가 쓰러지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먹는 족족 구토를 하며 괴로워하다가 겨우 진정이 되어 술이 들어가자 “야! 이제 술이 받는다! 살았다”를 외치며 마시고 또 마신다. 아내와 아들, 편집자들에게 온갖 민폐를 다 끼치다 알코올 병동에 들어가 겨우 살아나게 되었을 때 아즈마는 “이렇게 술을 마시다 파멸해버리는 것도 아름다운 건데”라고 중얼거린다.

알코올 중독자에 관한 지독한 파멸의 다큐멘터리 <샤이닝>과 그 속편 <닥터 슬립>을 쓴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한다. 알코올 중독자가 죽기 전에 그가 괴롭힌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것이라고. 왜 그렇게 마시고 또 마시며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가? <실종 일기>를 읽다보면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있는 이유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