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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와 엘리 슈라키의 <격노의 사나이>
박수민 2017-02-16

<격노의 사나이>

예전에는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직업군이 대부분 형사, 군인 아니면 범죄자, 자경단이었다. 그들은 법의 집행자가 아니라면 반대로 범법자였고, 그 공권력마저도 위법하게, 지극히 사(私)적으로 집행하는 일이 예사였다. 그들은 위험한 외톨이들이었다. 생겨먹은 성격이 처음부터 고집불통에 수구꼴통인 그들은 걸어다니는 인간흉기였고, 항상 개인적인 원한과 증오에 불타는 프로페셔널이었다. 나는 그런 영화들을 좋아했고 거기 나오는 그런 남자들을 사랑했다. 사실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솔직히 인정하자.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의 파시스트였다는 걸.

요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직업은 대체로 무엇일까? 글쎄, 외국은 슈퍼히어로와 스파이라면 한국은 검사와 조폭? 통틀어 직장인 아니면 아빠라고 하면 어떨까. 법이 곧 정의를 상징하던 시대는 지났다. 위험한 외톨이는 주인공쪽에선 사라지는 추세다. 론 울프는 주로 테러범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영웅이든 악당이든 남자들은 모두 어딘가 시스템에 소속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만큼 숭고한 직업이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남은 외톨이는 시스템에 똑같이 당하기 싫은 소년, 소녀들이다.

은퇴 후 알코올 중독자가 된 특수부대 출신 전직 정부 요원이 어느 부호의 딸을 경호한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짓들 때문에 번뇌하는 괴물은 천진한 어린이와의 유대를 통해 닫힌 마음을 연다. 하지만 업보 탓인지 씻김은 정녕 불가능하니, 악당이 나타나 그에게서 소녀를 납치하고 부모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납치범에게 돈을 건네는 일은 중간에 틀어지고, 소녀는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 죽다 살아난 이 괴물에게 남은 일은 그의 전공인 파괴와 살육을 통한 철저한 앙갚음이다. 전형적인 어느 남자 영화의 플롯. 온갖 베리에이션이 나온 원형.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2004)를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식의 남자 영화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세대에 우세했던 종(種)이 이제 멸망, 곧 소멸하게 될 거란 감각이었다.

뤽 베송의 <레옹>(1994)은 돌이켜보면 중년 남자와 10대 소녀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유대도 연대도 아닌 분명한 사랑이다. 소녀는 괴물을 사랑하고 괴물도 소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괴물은 소녀 대신 죽는다. 그러나 마지막 보이스카우트 토니 스콧은 차마 그런 사랑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맨 온 파이어>의 괴물과 소녀는 이상한 부녀 관계에서 머문다. 소녀가 잡혀가자 영화는 본래 목적을 실행한다. 그것은 남자의 파괴와 살육이다. 애초에 소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폭력의 이미지가 부족한 정서 위에 넘쳐흐른다. 복수의 이유인 소녀는 현란한 편집 효과로만 존재한다.

아이의 죽음을 쉽게 소모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이입하기 쉬운 감정 중 하나는 자식 잃은 부모의 원한이다.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분노는 너무 당연하기에 오히려 이야기를 만들 때 의심해봐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짓는 이야기도 너무 쉽게 아이들을 잡아가거나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 잔인한 세상에서 내 자식을 무사히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공포의 반영이며 남의 자식 역시 귀한 줄 알라는 교훈을 주지만, 그것이 주인공의 폭력을 설명할 막연한 동기로 소모되어서는 위험하다. 사라진 옆집 아이를 구하러 간 아저씨의 회상에 굳이 트럭에 치인 임신한 아내까지 나오는 건 과도하다(<아저씨>). 심지어는 자식 대신 키우던 개 때문에 한 조직을 괴멸시키는 남자도 나왔듯이(<존 윅>), 오로지 필요를 위한 동기는 때론 있으나 마나 한 이유가 된다. 진실 비슷한 것은 결국 진실이 아니며, 패러디는 진실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나 역시 내 영화에서 진실 비스름한 이유를 격렬한 고민 없이 써먹었다. 이 남자를 관객이 알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을 죽이자. 맙소사. 이런 식의 창작은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맨 온 파이어>에서 남자의 분노와 복수의 명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애매모호하다. 그는 어쨌거나 소녀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의 복수는 엄밀히 말해 부모의 대행이고 애초에 그럴 권리가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지나치다. 물론 어린이 유괴와 살인은 모두가 분노할 일이지만, 공권력이나 자경단이 아닌 남자에게 그 모든 폭력의 이유로는 동기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이 남자도 한때 아빠였다는 식으로 덧붙일 것인가? 주인공의 비등점에 도달해서 선을 넘어야만 이후의 폭력이 용인되는 것은 편협한 남자 영화가 가지는 최소한의 내부 논리다. 그는 왜 선을 넘어버렸는가? 괴물과 소녀의 ‘사랑’은 죽어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먼저 영화로 만들었던 엘리 슈라키의 <격노의 사나이>(1987)는 그 이유를 ‘우정’ 때문이라고 답한다.

<맨 온 파이어>

사랑이 아니라 우정 때문에

오프닝에서 이미 시체 자루에 담겨 있는 남자는 “이것이 바로 나의 마지막 모습이다”라고 말한다. 죽은 남자의 무덤덤한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영화는 그가 왜 여기에 죽어 있는지의 이유로 향한다. 우리에겐 FBI 국장급 전문 배우로 낯익은 스콧 글렌이 온갖 전쟁터를 겪은 전직 CIA 요원으로 나오는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이 남자 역시 과거에 얽매여 마음을 닫고 산다. 그가 경호해야 할 소녀는 첫 만남에 대뜸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책을 내민다.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에서 소녀가 읽어주는 부분은 이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에겐 가족이 없지.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신경 안 써. 하지만 우리는 달라. 나한테는 네가, 너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우리에겐 서로가 있으니까 괜찮아.” 처음에 남자와 관객은 이 구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영화를 따라가다 남자와 소녀를 떠나서 두 외톨이가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야 이 구절은 가슴을 치는 비등점으로 작동한다.

이 구절은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레니’의 대사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법”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연상시키는 레니는 자기 손에 들어온 사랑스러운 짐승들을 쓰다듬다 끝내 죽여버리고 마는, 큰 덩치에 괴력만 지닌 모자란 남자다. 영화 속 소녀는 재미있게도 자신을 경호하는 남자를 이 이름으로 칭한다. <격노의 사나이>는 극중 부모의 비중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를 오로지 남자와 소녀의 이야기로 몰고 간다. 그들이 어떻게 우정을 쌓는지가 중요하고, 소녀가 납치되었을 때 남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중요하다. 온몸으로 총알을 맞아가면서 절뚝거리며 소녀를 찾는 남자의 행적은 복수라기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무자비하게 악당을 처치하는 통쾌함은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일견 이상할 정도로, 당연히 필요해 보이는 신들을 찍지 않았거나 최종 편집에서 집어넣지 않았다. <맨 온 파이어>에서 남자와 소녀는 죽음 앞에서 다시 만나고 둘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말을 하고 그 모든 액션과 리액션은 영화에 오롯이 담겨 감정의 폭발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당연한 장면이 없다. 고전을 인용하는 반칙을 써먹은 대신, 관객의 눈물을 짜낼 직접적인 대사 하나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에는 둘이 시체처럼 나란히 누운 장면과, 처음으로 돌아가는 죽음만 있다. 에필로그의 앵글도 멀리서 잡았다. 그런데 눈물이 흐른다. 나는 이제 어떤 장면을 찍은 영화보다 어떤 장면을 안 찍은 영화에 놀란다. 온갖 장면이 넘치는 영화보다 특별히 선택한 장면만 있는 영화에 경외감을 느낀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였다.

1991년 4월27일 토요일은 한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텔레비전 편성이 있던 날이었다. KBS2에서 오후에 뜬금없이 이 <격노의 사나이>를 특선영화로 틀어주었다. 이때 제목은 <제2의 인생>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스포일러가 아니라 중의적인, 꽤 근사한 제목을 붙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밤에는 MBC에서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1976)를 방영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이 두 영화 중 한 영화라도 안 보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를 보고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남자 영화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말로 한 시대가 끝난 듯 서글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마지막 남자 영화를 본 날은 1991년 4월의 어느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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