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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봅시다]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본 <아이히만 쇼>의 아돌프 아이히만
이예지 2017-03-06

집단적인 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체제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한 명령 복종에서일까, 체제의 신념을 능동적으로 내면화한 적극적인 가해 행위에서일까. 독일 나치의 중령으로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그려낸 <아이히만 쇼>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에서 이야기에 접근한다. 실제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레오 허위츠 감독(앤서니 라파글리아)은 아이히만이 특별한 악마가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보여주려 했다. 히틀러가 사라진 지금에도 파시즘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기에, 우리 모두가 그처럼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만 함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악마 혹은 충성스러운 관료, 아이히만은 과연 누구일까.

아돌프 아이히만은 누구인가?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중령(최종 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 1932년 나치당에 가입했고,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및 강제 이주, 학살을 계획·지휘하였고, 수용소에 5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열차로 수송했으며 총 600만명을 학살했다. 독일의 항복 후 미군에 체포되었으나 가짜 이름을 사용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고, 1950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은신하던 중 1960년 5월 이스레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돼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 법정의 공개 재판에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 책임을 물어 1962년 6월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잡지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 과정을 참관한 뒤 의외의 모습을 접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고 밝힌다. 아이히만은 검사의 심문에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반복했다. 아렌트는 1963년 출판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출했다. 악은 악마적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들이 무비판적으로 체제를 받아들일 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이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며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바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던 것”이라고 서술한다. 아렌트는 “나치즘와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결론짓는다.

악마 혹은 충직한 관료, 실상은 무엇이었나

아이히만은 1932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독일로 들어와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일했다. 유대인의 대량이주계획에 반대하며 학살만이 유대인을 축출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보고서를 상부에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친위대 중령으로 승진해 게슈타포 유대인과 과장으로 임명된 뒤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말살을 결정했을 때 아이히만은 집행을 위임받았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다. 독일 패전 후 은신해 있던 그는 옛 친위대 동료 빌렘 사센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1천만명의 유대인을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난 단순한 얼간이 명령수행자가 아니었고 이상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사실에도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은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발생한 이유를 상부 명령을 받은 수행자의 사고능력의 마비에만 한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개인이 잘못된 신념을 내면화해 폭력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조직 내부의 정치적 사회화를 통해 폭력이 확산되는 과정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