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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터널 끝의 빛
김혜리 2017-03-08

※<컨택트>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컨택트>에서 백색 스크린- 때로는 언어를 가르치는 화이트보드 역할을 하는- 을 사이에 두고 헵타포드와 지구인들이 접촉하는 어두운 방은,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영화관>(Theatres) 연작을 곧장 연상시켰다. 1976년부터 지금까지 발표되고 있는 이 시리즈는 미국 각지의 구식 극장과 드라이브 인 시어터를 촬영한 작품들로, 상영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조리개를 열어두고 스크린을 유일한 광원 삼아 빈 극장 실내를 찍은 결과다. 스기모토 히로시가 찾아낸, 정사진으로 시간을 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희게 빛나는 스크린은 영화 한편을 이루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총합이다. <컨택트>에 등장하는 만남의 방 역시 낯선 세계와 조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영화관과 닮은 데가 있다.

02/08

<녹터널 애니멀스>와 <컨택트>의 에이미 애덤스가 제89회 아카데미 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팬들을 위로하자면, 오스카의 생리를 감안할 때 이번 노미네이션 탈락은 적금의 마지막 달치를 불입한 셈 칠 수도 있다. 가까운 미래에 에이미 애덤스가 주연상 후보에 오를 경우 아카데미 회원들이 올해의 미안함까지 얹어 그녀에게 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는 가설이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꺼낸 김에 마저 하자면 <녹터널 애니멀스>와 <컨택트>에서 에이미 애덤스가 한 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톰 포드 감독과 드니 빌뇌브 감독은 공히 애덤스가 연기한 캐릭터로 관객을 낚는다. 두 영화에서 에이미 애덤스의 캐릭터는 영화의 약 2/3 지점까지 관객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경계선을 걷는 미묘한 자세를 지속한다.

<컨택트>의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찾아오기 전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독에 적응해서 사는 인물처럼 보인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녀의 얼굴은 깊이 가라앉아 있으며 밤이면 지나치게 넓은 집에서 홀로 와인을 마시다 잠든다. 헵타포드들과 달리 시간을 인과적으로 인식하는 지구인인 까닭에, 관객은 <컨택트>의 프롤로그에서 목격한 불행을 루이스의 과거에 일어난 일로, 우울의 원인으로 자동적으로 간주하게 된다(플래시백인 줄 알았던 장면이 실은 플래시 포워드였음을 발견한 순간 나는 스크린에서 거의 나이먹지 않는 여성배우의 외모를 부지중에 당연시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수잔은 영화 중반부 내내 ‘독서 연기’를 한다.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홀)가 보내온 소설의 원고를 읽는 그녀의 리액션은 엄청나게 심각하고 위태로워서 관객으로 하여금 소설이 묘사하는 폭력적 비극이 수잔 본인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상당히 오랫동안 잘못 넘겨짚게 만든다. 페어플레이 연출이냐 아니냐를 떠나 연기를 통한 트릭이 서사의 반전에 긴요한 <컨택트>와 달리 <녹터널 애니멀스>가 유도하는 착각은 목적이 빈약하다. 전남편과 헤어진 사연이 극중에 소개되기 전까지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두는 압핀의 기능이랄까? 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부여되지 않은 수잔이라는 캐릭터의 진공을,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이 탁월한 배우의 얼굴이 메운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 물론 수잔과 루이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직업에 비해 말도 안 되게 고급스런 집에서 산다는 사실이다.

02/15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자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관한 보편적 이야기이지만, 보다 특정하게는 백인 남성 최루 멜로드라마다.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뉴잉글랜드의 바닷가 고향 마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가족을 이루고 친구들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다음 퀸시로 이주한다. 도시로 간 리는 작은 아파트 관리인으로 홀로 일하며 형편없는 임금과 숙소를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자발적 귀양살이다. 사랑하는 형의 죽음을 수습하기 위해 리가 마지못해 귀향하면,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사건 이전 리에게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얼마나 낙원이었으며 현재의 삶과 정반대였는지 보여준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어촌은 넉넉한 블루칼라 백인 남성들의 안온한 공동체다. 리 형제를 포함해 그들에게는 집과 차와 보트가 있고 병에 걸리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여력이 있다. 사고 직후 리가 조사받는 장면이 증명하듯, 법도 그들의 편이다. 오랜 이웃인 경찰은 오히려 리를 위로한다. 반면 영화 도입부가 보여주는 현재의 영락한 리는 아파트의 여성 세입자들에게 ‘치근거림’을 당하고 흑인 관리소장에게 잔소리를 듣는 처지로 대비된다.

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로부터 “난데없이 죽음이 튀어나오는 시트콤”이라는 평까지 이끌어낸 이 영화의 큰 덕목은 삶의 저점에서도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유머를 포착했다는 데에 있는데, 이는 극중 챈들러 집안 남자들의 가풍이기도 하다. 조의 아내 엘리스(그레첸 몰)와 리의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스)는 정도는 다르지만 이 유머에 완전히 동참 못하는 국외자로 그려진다. 엘리스는 난치병 판정 앞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남편의 가족에게 화를 내고 랜디는 장난꾸러기 남편을 밀어내기 바쁘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형제, 부자, 삼촌과 조카, 남성 친구들의 유대는 강고하고 그것을 묘사하는 필치도 뛰어난 반면, 여성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자기중심성이 강하거나 경박한 모습을 보인다. 엘리스는 남편의 병을 술로 회피하다가 끝내 가족을 버리고 도망치고 나중에 그녀가 재혼한 새남자(매튜 브로데릭)는 냉랭하고 엄숙한 화이트칼라로 모든 면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남자들의 대척점에 가깝다(따지고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어두운 결말을 맞는 인물은 리가 아니라 엘리스다). 10대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이 양다리 걸친 두 여자친구는 성적 통과의례의 대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리의 인생을 망가뜨린 과거의 사고 역시, 정황 묘사를 통해 랜디가 파티를 벌이던 리의 친구들을 내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얄궂은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미셸 윌리엄스가 놀라운 집중력으로 표현한 랜디는 궁극적으로, 짧은 출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메시지를 대변함으로써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편향된 여성 묘사에 대한 알리바이가 되긴 한다. 케네스 로너건은 현명하게도, 가슴이 찢어진 랜디가 끔찍한 과오를 저지른 남편에게 퍼부었을 질책과 증오의 언어들을 관객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지 않는다. 영화 후반 길에서 마주친 랜디와 리의 대화는 137분을 통틀어 유일하게 리가 진실을 직시하고 속내를 소리내어 말하는 순간을 끌어낸다. 문제의 한마디는 “난, 이걸 이길 수가 없어”(I can’t beat it)라는 패배의 선언이지만 저주를 푸는 주문인양 이 말을 입 밖에 낸 다음부터 리는 조금씩 숨쉬기 편해진다. 마치 엄마가 사랑한다고, 너한테 심했다고 말하며 용서해줄 때까지 속울음을 꾹꾹 누르며 벽을 보고 앵돌아져 있던 어린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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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미국영화에서 젊은 흑인 남성 캐릭터가 걷는 길에는 전형이 있다. 폭력을 휘두르거나 맞거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마약상이 되거나, 경찰에 체포되거나 경찰시험에 합격해 백인 파트너 앞에서 순직하거나 등등.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에도 언급한 내용 중 일부가 불가피한 현실로서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문라이트>에는 스크린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의 이미지들이 있다. 주인공 샤이론은 남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근육질의 팔뚝으로 친구의 전화를 조심스레 받는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꼬마 샤이론에게 대부 역할을 하는 후안(마허샬라 알리) 아저씨가 헤엄을 가르쳐주는 모습은 <문라이트>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관객은 신성한 침례(浸禮) 같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미국영화에서 흑인 성인 남자가 아이를 안아 보살피는 이미지를 본 적이 있나 기억을 되짚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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