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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오늘도 출근합니다> 킵고잉 작가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7-03-20

“쑥쑥이는 낮에는 번듯한 직장인이지만 밤에는 매일 사표 쓰는 여자다. 하지만 쑥쑥이에겐 꿈이 있으니….” 바로 웹툰 작가다. <오늘도 출근합니다>의 킵고잉 작가는 스스로 프로 직장인, 아마추어 웹툰 작가라고 부른다.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웹툰으로 그리다보니 어느새 팔로워만 4만명이 넘는 인기 작가가 됐다. 여느 작가처럼 웹툰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도 단행본을 낼 정도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지만 킵고잉 작가는 여전히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다. 좌절할지언정 꿈을 좇아가보자는 다짐으로 웹툰을 그리지만 실은 하루하루의 평화를 기도하는 평범한 직장인 킵고잉 작가를 만났다.

-절망의 오피스레이디’라는 제목을 자기소개라고 봐도 될까. (웃음)

=한때는 정말 분노와 절망의 오피스레이디였지만 웹툰을 시작한 후 평화를 찾았다. (웃음) 네이버 포스트 공모전 마감 직전에 즉흥적으로 지은 거라 필명인 킵고잉, 주인공인 쑥쑥이까지 모든 이름에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담았다. 책이 나올 줄 알았으면 좀더 멋지게 지을 걸 그랬다. (웃음)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그림으로 풀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직장인이다. 보통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취직하고, 열심히 직장을 다녔다. 작품을 연재한다는 걸, 이런 작품이란 걸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평화로운 직장 생활을 유지하려면 신변보호가 필요하다. (웃음)

-직장 다니는 와중에 웹툰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내 세계가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고,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해야 한다. 말의 내용보다 꺼낼 때의 타이밍, 형식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집에 오면 정신적인 허기에 시달리는 게 다반사다. 스스로 프로 직장인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도 있다. 어느 날 상사와 크게 한판 싸우고 나서 도저히 분이 안 풀리는 거다. 술을 먹어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던 내가 당한 일을 일기처럼 그림으로 그려봤다. 그런데 웬걸?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거다. 그때부터 조금씩 그려가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웹툰 형태로 연재하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정도였다. 대학 친구들을 가끔 만나면 매번 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누군가 한명이 ‘우리 인생은 이걸로 끝이니?’라고 물으면 각자 하고 싶었던 일을 말한다. 그렇게 푸념만 5년째 하다보니 진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네이버 포스트 서비스를 기념해 좋은 콘텐츠를 올리면 상품을 주는 이벤트를 봤다. 1등 상품이 아이패드였는데 그게 욕심나서 만화를 5편 정도 그려서 올렸다. 그렇게 아이패드를 받고 시작됐으면 참 좋았겠지만. (웃음) 참가상으로 상품권 1만원짜리를 받았다. 그런데 만화가 재미있다는 댓글들이 하나둘 보이는 거다. 공감된다는 반응을 보면서 틈날 때마다 그려서 올렸다. 좋은 일 있으면 좋아서 그리고, 나쁜 일 있으면 기분 풀려고 그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책이 되어 나왔더라.

-중간에 엄청난 생략이 있는 것 같은데. (웃음) 웹툰 코너에 정식 연재를 하지 않고 본인의 포스트에만 올렸다. 정식 웹툰 작가로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나는 아직 아마추어다. 한때는 나도 꽤 잘 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을 보니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 ‘도전만화’ 코너에 도전하는 작가 지망생들은 오직 작품을 위해 매진하는 분들도 많지 않나.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뒷방에서 사부작사부작 취미로 그리는 느낌이랄까. 회사를 그만둘 마음도 없고. 게다가 회사 생활이 내 영감의 원천인데 그만두고 나오면 곤란하다. (웃음)

-아마추어라고 하기엔 그림은 물론이고 스토리 구성이나 전개가 프로 수준이다.

=어릴 때 꿈은 만홧가게 사장이었다. 지금은 지인이 그 꿈을 대신 이뤄줬지만. (웃음) 글쓰기에 관심은 있지만 역량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인터넷 관련 업무를 담당해 짧은 글에 익숙하다. 짧은 문장과 그림, 두 가지에 조금씩 관심을 두다보니 둘을 섞어서 시작하게 된 거다. 여기에 직장인의 푸념이라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취미로 시작했을 때와 일이 되었을 땐 상황이 다를 것 같은데.

=다행히 아직은 즐겁다. 도리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겼을 때 ‘아싸! 소재 하나 건졌다’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겼다. 지금 걱정은 새로 옮긴 직장이 외국계 회사인데 심적으로 너무 편하다는 거다. (웃음) 창작에는 결핍과 상처가 필요한데 여긴 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그래서 예전 직장에서 얻었던 소재들을 곶감 빼먹듯 빼먹고 있다.

-후반부는 일상툰에서 스토리툰으로 변화한다. 장기적으로 스토리툰도 하고 싶나.

=물론 마음은 있다. 번외편으로 들어간 연애편은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와 관련해서 직장 내 연애에 관한 웹툰을 10회 정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작업한 거다. 스토리툰을 해보고 싶었는데 계기가 없던 차에 흔쾌히 작업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버겁더라. 일이 아니었으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웃음)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단행본에도 넣었다.

-절망의 오피스레이디가 오늘을 버티는 동력은 무엇인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사는 타입은 아니다. 목표가 있다면 안빈낙도하는 삶이다. (웃음) 등 따습고 배부른 일상, 오늘 하루를 편안하게 마무리하는 게 꿈이다. 행복은 범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직장에서 안 잘리고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는 기적 같은 순간이 종종 찾아와주면 나로선 더 바랄 게 없다. 굳이 하나 더 말하자면 예전에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연습하고 점심 먹고 연습하고 집에 돌아와 잠시 쉬다가 잠든다. 다시 태어나면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카잘스는 답한다. 첼리스트가 되어 지금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나 역시 다시 태어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지금은 그게 만화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있다. 소소한 자부심과 함께.

힘이 되어준 마스다 미리와 김보통

“김보통 작가를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다. 직장에서 일 관계로 만난 게 전부였는데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셨다. 김보통 작가의 만화를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꼭 미술 전공자가 아니라도 웹툰을 할 수 있다는걸 알려준 작가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고 싶은 또 한 사람은 마스다 미리. 처음에는 이 정도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고. (웃음) 나중엔 내가 직장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킵고잉 작가의 한컷

“직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당신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미친 분들이 대기 중이다. 지뢰처럼 곳곳에 포진한 그분들을 피할 수 없을땐 ‘다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세상에서도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조언을 되새긴다. 어떤 일도 다시 태어나는 일보다는 쉽다. 예전에는 나를 울적하게 했던 미친 분들이 지금은 내 만화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위로가 되는 것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더라.”

마커홀릭

“사실 웹툰을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미술학원을 다닌 적은 없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은 쭉 품고 왔던 것 같다.” 만화 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다양한 그림들을 그린다는 킵고잉 작가의 작업실에는 민화,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판화, 마커펜으로 그린 일러스트까지 여러 그림들이 놓여 있다. 자칭 마커 마니아라는 그녀는 직접 제작한 마커팬 전용 통을 직접 제작해 사용 중이다. 언젠가 비행기 입국심사에서 직업란에 적고 싶은 자기소개는 무려 ‘아마추어 일러스트레이터’!

킵고잉 작가의 작업실

“누구나 작업실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나. 그림만 그리는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 이사 오면서 방을 하나 비워 마련했다. 하지만 거기서 작업을 하면 졸려서 오래 있진 않는다. (웃음) 꾸며놓긴 했는데 막상 작업은 거실에 퍼질러서 하거나 카페에 가서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킵고잉 작가의 다음 로망은 언젠가 집 밖에 제대로 된 작업실을 마련하는 것. 모름지기 출퇴근을 해야 제대로 일이 되는 법이란다. 그리고 잊지 않고 덧붙이는 한마디. “아직은 프로 아닌 아마추어라 지금 작업실을 유지할 예정이다. 가능한 한 오래오래.”

내 인생의 영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감독 에이드리언 말론 외 출연 칼 세이건, 1980)

“개봉 영화도 챙겨보지만 주로 꽂히는 작품들을 찾아서 다시 보는 편이다. 최근에 마음을 흔든 건 <색, 계>(2007)와 <보이후드>(2014), 그리고 1980년 출간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다. 책이 너무 두꺼워서 다큐멘터리로 봤다. (웃음) 칼 세이건은 과학자지만 문학상을 받아도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장에는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는 광막한 우주, 영겁의 시간 속에서 지구라는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 중고생 때 했으면 좋았을 경험을 지금에야 하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지는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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