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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타] 감정을 지우는 감정 연기 - <보통사람> 장혁

반전이었다. <추노>의 이대길로 대변되는, 뜨겁고 정의로운 역할을 주로 맡아온 장혁이 안기부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역을 맡다니. 인터뷰에서 또 한번의 반전이 이어졌다. 소탈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장혁은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그리고 풍성하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섬세한 비유와 은유들을 동원하는 달변가였다. 40대의 초입, 한순간도 방만해지지 않고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도전 중이라는 장혁과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보통사람>은 혼란하고 어두웠던 1987년의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느낌은 어땠나.

=먹먹하고 막막했다. 80년대에 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진(손현주)의 아들 민국이 정도의 나이였고, 그 나이 땐 운신의 폭이 적었으니까. 체험해서 알게 된 것과 학습해서 알게 된 것간의 괴리가 있지 않나. 후자의 세대였지만, <보통사람> 속에 들어가 연기하면서는 직접 체감하는 느낌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안기부 실장 규남 역을 맡았다. 이렇게 철저한 악역을 연기한 건 처음이지 않나.

=지금 나이가 40대 초반이다. 중·후반을 준비하기 위해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던 참이었고, 한번쯤 철저한 안타고니스트 역할에 도전하고 싶었다. 이전에도 악역을 연기한 적은 있지만 <순수의 시대>(2015)의 이방원이나 <의뢰인>(2011)의 철민 같은 정서적인 연기였고, 이렇게 무감정한 역할은 처음이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베일에 싸여 있으면서도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규남이 매력적이더라. 배우로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온도 차이를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규남은 악랄한 행위를 하면서도 원칙과 소신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는 정말 자신이 애국을 하고 있다고 믿는 건가.

=그렇다. 그게 잘못된 원칙과 소신이어서 그렇지. 감독님은 규남을 무너뜨릴 수 없는 벽, 시스템의 얼굴로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사리사욕을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관리체계 안에서 일을 수행하는 관리자로 본 거다.

-그런 감정 없는 인물을 표현하는 게 쉽지는 않았겠다.

=그의 냉정함의 토대는 어디에 있을까 고민해봤다. 생각해보면 그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직접 발로 뛰지도 않고 고문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시를 내릴 뿐이다. 말들이 떼로 달릴 때, 앞의 말이 방향을 조금만 틀어도 뒤의 말들은 따라잡기 위해 확 틀어야 하지 않나. 조금만 몸을 틀어도 되는 그런 여유, 지시하고 명령하는 사람의 여유를 생각했다. 그러니 많은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더라. 한평의 연기랄까. (웃음) 지진이 본격적으로 나기 전에 조용하게 닥치는 전조현상 같은 인물이었다.

-그도 처음부터 그런 인물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된 연유에 대해 생각해 봤나.

=감독님이 규남은 벽이라고 했을 때, 그 벽에도 무늬나 색이 있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규남에게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있을 텐데. 영화상에서 보여주지는 않지만 아마도 학생 때 규남은 달랐을 거다. 그래서 딱 두 장면에서 규남의 감정을 표출했다. 초반에 규남이 자신이 배웠던 교수의 강의실에 찾아갈 때, 후반부 검사와의 대면에서 자신을 없앤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는 조소를 보여줄 때. 결국 그는 자신도 체스말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규남은 장혁이 여태까지 연기한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발성과 말투를 사용한다. 아주 여유롭고 나긋나긋한데.

=스포츠를 할 때 초심자들에게 힘빼고 하라고들 하잖나. 복싱에서도 힘을 풀고 여유 있게 하면 오히려 더 무게와 힘이 실린다. 그런 느낌으로 힘을 풀고 어미를 늘어뜨렸고, 권유하듯 청유형의 문장들을 사용했다. 대사의 톤을 정하면 블로킹은 따라가니까 몸에도 힘을 풀게 되더라. 연기는 리듬이라, 이렇게 힘빼고 하다가도 어쩌다 한번 뺨을 치는 등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고 나면 힘을 풀고 있어도 사람들은 긴장을 하고 지켜보게 된다. 여태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진 안기부 직원들의 전형성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영화를 찍기 전 레퍼런스들을 찾아봤는데, <바람의 소리>(2009)라는 중국영화의 노인 고문기술자가 인상적이더라.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 일상적으로 여유롭게 고문기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전형성을 벗어나니 오히려 그게 더 살벌한 거다. 그런 의외성을 살리고 싶었다.

-이번 역할이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하나의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또 어떤 확장이 있을까.

=깊이 있게 들어가는 작품들은 여태까지 해왔던 것과 유사해도 할 테고, 그외엔 계속 변화를 주려고 한다. 배우는 수요가 있어야 하는 직업이고, 스스로를 세일즈해야 하는 일이다. 관객이 찾지 않는 배우를 누가 캐스팅하겠나. 관객이 새로운 면모를 늘 재발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는 한편, 하나에 대해서만큼은 독보적인 영역도 갖춰야 한다. 양쪽 모두를 갖추기 위해선 끊임없이 해야지. 어느 쪽도 게을리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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