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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언포기븐
김혜리 2017-03-29

※<로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러빙>

<러빙>의 밀드레드와 리처드 러빙 부부는 피부색 다른 시민의 결혼을 금지하는 1960년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법에 저항한 실존 커플이다. 제프 니콜스 감독의 모든 영화에 출연한 배우 마이클 섀넌은 이번 영화에서 감독의 분신인 양 <라이프>의 사진작가 빌렛 역으로 등장해 러빙 부부의 일상을 조심스레 관찰한다. 긴장이 풀린 리처드가 밀드레드의 무릎을 베고 TV를 보며 웃는 숏은 실제 <라이프>에 실린 사진의 재연이다. 가장 평범한 결혼의 행복을 포착한 이 이미지는 다만 기본적이고 자연스런 권리를 범죄로 만드는 법을 향한 거센 반문이다. 빌렛은 이 사진을 찍을 때 러빙 부부의 친밀한 순간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들어올리지도 않은 채 살그머니 셔터를 누른다. 인물의 프라이버시를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본질로 규정하고 애지중지하는 태도는 영화 <러빙>의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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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사의 마블 스튜디오에 대적하는 ‘청소년 관람불가’ 전략은 <데드풀>에 이어 <로건>에서도 성공적이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전작 중 본인이 연출한 같은 시리즈 소속의 <더 울버린>(2013)보다 네오 웨스턴 <3:10 투유마>(2007)로 돌아간다. 노쇠한 로건/울버린(휴 잭맨)은 더욱 노쇠한 멘토 찰스(패트릭 스튜어트)를 ‘봉양’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길 희망하나 다음 세대 뮤턴트 로라(다프네 킨)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혈겁의 여정에 오른다. <로건>의 차별성은 할리우드 전통 장르를 전면(前面)에 내세워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절충적이고 매끈한 톤으로부터 이탈했다는 점과 스토리의 자체 완결성, 두 가지로 요약된다. 일찍이 마블도 슈퍼히어로영화의 단조로움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첩보물), <닥터 스트레인지>(오컬트), <앤트맨>(코미디)으로 일정 수준 실천했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마블 영화들은 대동소이하다는 인상을 벗기 힘들다. 모든 영화가 앞뒤 영화의 ‘브리지’ 구실을 해야 한다는 태생적 한계가 불가피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별 마블 영화의 감독들은 시나리오의 결론부에 이르러 흡사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는 축구 수비수들처럼,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를 곁눈질하느라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인물의 행적은 축적되지 않고, 시간여행과 유전자 복제라는 장치에 힘입어 상실도 죽음도 다음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마블 슈퍼히어로물들은 영구적 팽창과 탈역사를 도모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과 폭스는 상대적으로 ‘유니버스’에 개의치 않는다(물론 지금쯤 다음 휴 잭맨을 잇는 차기 울버린 캐스팅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도 높지만).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노화와 유한한 수명을 영화에서 정면으로 다룬다. 울버린의 노화는 치유력이 상처의 치명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태로 표현되고 찰스의 그것은 치매성 착란과 타인의 마인드를 움직이는 능력의 둔화로 드러난다. <로건>은 17년간 근속한 휴 잭맨의 울버린에게 합당한 은퇴 행사를 치러주는 데에 집중한다. 그리고 세리머니의 식순은 조지 스티븐스의 <셰인>(1953)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 빌려온다. 한데 제임스 맨골드는 혹시나 관객이 영화적 인용을 창의성 부족으로 오인할까봐 불안해서인지, “우리 지금 오마주 중”이라고 과하게 티를 낸다. 찰스와 로라가 함께 호텔 객실에서 마침 <셰인>을 시청하며 대사를 곱씹는 신은, 기우에 가까운 연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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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이 묘사하는 2029년의 미국 풍경은 다분히 트럼프적이다. 이 영화에서 미국의 국경을 넘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호모사피엔스들은 자연 출생한 뮤턴트를 절멸시키는 것에 거의 성공한데 그치지 않고 인간형 병기로 유전자 실험을 통해 X-23세대를 만들어냈다. 멕시코의 비밀 실험실에서 태어난 로라와 친구들은 적의 심장부 미국을 종단해 캐나다로 탈출하려고 하는데 아마 2029년에도 캐나다는 저스틴 트뤼도 총리가 집권 중이라는 가정인가보다. <로건>의 로드무비형 스토리를 2시간 이상 따라가며 나는 이 영화에 붙일 수 있는 닉네임을 다수 떠올렸다. ‘용서받지 못한 돌연변이’, ‘리틀 미스 울버린’, ‘칠드런 오브 엑스맨’, ‘X-터미네이터’ 등등. 이 많은 연상은 뒤집어 말하면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보여준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로건>의 서사가 객관적으로 독창적이지는 않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로건>은, 우아한 염동력 말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제 손으로 사람을 찌르고 베어 온몸을 피칠갑해야 생존 가능한 정당방위형 ‘연쇄살인자’가 장년에 이르렀을 때 직면할 환멸과 역겨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울버린은 세포가 재생될지언정 매번 고통을 느낀다. 육체의 통증이 가시면 눈앞에 산을 이룬 시체의 무게가 고스란히 죄책감으로 남는다. 울버린은 심지어 손등에서 아다만티움 칼날이 솟을 때마다 아프다고 <엑스맨>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즉 <로건>은 12세 관람가 등급에 맞춰 소독된 울버린의 폭력 묘사를 ‘현실화’함으로써 로건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아프고 끔찍한지 비로소 생생히 전한다. 원작 팬들로부터 “이게 울버린이지!”라는 환호를 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는 울버린과 로라가 중심에 있는 <로건>의 잔혹한 액션 신들을 꺼림칙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폭력과 살생의 참혹함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한 걸까, 아니면 자극의 공급원으로 착취한 걸까? 나는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동강나는 이미지를 부각시킨 이 영화의 액션을 마음 한편에서 가학적으로 즐기다가 나중에는 심지어 둔감해지지 않았는가? 살생의 업에 대해 번민하는 영화치고 <로건>의 연출에서는 <셰인>과 <용서받지 못한 자>가 보여준 절망적인 회의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대목은, 호텔방에 남아 있던 찰스와 로라가 ‘요원’들에게 습격당하는 시퀀스다. 찰스는 예의 능력으로 죽음 직전에 시간을 멈추지만 노쇠로 인해 적들은 움직이지 못하되 의식이 살아 있는 상태다. 외출했던 로건은 초인적 힘으로 정지된 시공을 거슬러 두 사람을 구하러 호텔로 돌아와, 찰스의 염력이 풀리기 전에 (슬로모션으로) 마비된 적들의 두개골을 찌르고 몸을 벤다. 의식이 살아 있는 요원들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다가오는 로건의 칼날을 (슬로모션으로) 목격한다. 로건은 움직이지 못하는 적과 눈을 맞추며 상대를 죽인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공격을 방어하는 살인이고 영화는 이 시간을 확장하고 있다. 이것은 자동차 바퀴에 치어 뒤틀리는 얼굴을 고속촬영으로 잡아내는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의 악취미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스스로가 쌓은 살인의 악업을 떨쳐낼 수 없다는 고백을 한 로건에게 영화는 이 이상한 ‘정당방위’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맨골드 감독은, 아마 로건이 반성을 하기엔 너무 지쳤다고 판단했나보다. 결론적으로, 나는 <로건>이 <엑스맨> 시리즈 최고 걸작이라는 의견에는 표를 보탤 수 없다. 아울러 <로건>의 울버린이야말로 참다운 울버린이라는 평에도 동조하기 힘들다. 고뇌만이 사람의 진정은 아니다. <로건>의 울버린에게는 특유의 유머가 없다. 내겐 늙은 로건의 회한만큼, 젊은 로건의 심술궂은 조크와 냉소도 울버린의 본질이다. 우열을 따지기보다 지금까지의 <엑스맨> 시리즈가 어쨌든 원색 잉크로 채색된 코믹스의 팝아트풍 문법 안에 있다면, <로건>은 두껍게 그려진 유화다. 화법(畵法)이 다른 그림이다. 아무튼 <로건>이 선택한 울버린의 마지막 대사 “이런 느낌이었군”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로건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죽음의 감각과 더불어 ‘가족’과 눈을 맞추는 기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아는 엑스맨들이 이미 죽었다고 전제한 <로건>을 보는 동안, 그들 각자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개별 감독의 분방한 해석을 담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좀 잔인하고도 실현 가능성 없는 상상에 빠졌다. <에릭> <레이븐> <쿠르트>…. 아, 취소다. 슬퍼서 못 견딜 것 같다.

<미스 슬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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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돌개바람

<미스 슬로운>의 제시카 채스테인은 TPO- 장소, 시간, 상황- 에 딱 맞는 차림과 칼같이 자른 빨간 단발머리로 돌풍처럼 스크린을 누빈다. 그녀가 연기하는 워싱턴 D.C.의 로비스트 매들린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숨겨진 인간미를 유능함의 ‘알리바이’로 들이미는 슈퍼우먼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워커홀릭이고, 상대보다 한수 앞질러 사고하는 전략가다. 같은 일을 하는 남자들과 다를 것 없이, 불면증과 스트레스를 비밀스런 수단에 의존해 풀고 개인적 신념이 업무와 합치되면 금상첨화라고 여긴다. 매들린은 투사도 사기꾼도 아닌, 독하게 유능한 로비스트다. 영화의 중심에 있는 총기 규제 법안 로비전은 매들린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동시에, 불리한 입장에서 대승을 거두고 싶다는 직업적 야심을 충족시키는 과제다. <미스 슬로운> 상영 후 어느 관객과의 대화에서 채스테인은 매들린 캐릭터에 대한 여성관객의 치하에 이어 한 남성 관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 여자 사이코패스 아닌가요?”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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