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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김꽃비의 <히든 피겨스> 기대하고 기다린 이야기
김꽃비(배우) 2017-04-05

감독 데오도르 멜피 / 출연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저넬 모네이 / 제작연도 2016년

내 인생의 영화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받고 글을 쓰던 중, 기대하던 <히든 피겨스>가 개봉했다고 해서 보러 갔다. 그리고 나는 원고를 뒤엎고 내 인생의 영화를 <히든 피겨스>로 결정했다.

<히든 피겨스>는 흑인 여성들이 차별과 편견에 맞서 꿈을 이뤄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주인공들은 흑인이면서 여성이다. 백인사회에서는 흑인으로서 차별받고, 흑인 사회에서는 여성으로서 편견에 부딪힌다. 주인공은, 여성은 수학에 약하다는 편견,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할 것이라는 편견이 그야말로 편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천재 수학자이다. 이렇게 뛰어난 천재임에도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전산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이 조금씩 용기를 내고 기회를 만들어 나가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나간다. 이렇게 희망차고 멋있는 이야기가 실화라니! 보는 내내 너무나도 벅차고 긍지가 차올랐다.

동시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익숙한 서사를 상상했다. 캐서린이 짐 존슨을 만났을 때, 저 남자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해 캐서린을 상처주지 않을까, 저 남자 때문에 캐서린의 꿈이 좌절된다거나 고통받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또 메리가 포부를 가질 때 옆에서 말리는 남편 때문에 그녀가 포기하게 되거나, 가정과 아이들을 두고 꿈을 향해가는 일이 힘들어서 지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꿈을 이루고 싶을 때 가정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걸림돌이 되지 않듯이 메리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고 그것이 가정과 아이들을 내팽개치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그려지지도, 그 때문에 갈등하지도 않았다. 메리의 남편은 다만 메리가 꿈이 좌절되면 상처받을까봐 걱정했던 것이었고 그 후로는 듬뿍 격려해준다. 짐 존슨도 캐서린의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최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비밀은 없다> <고스트버스터즈> <미씽: 사라진 여자> 등 여성 캐릭터 중심의 서사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는데, 이는 관객으로서도 정말 반가운 일이지만 배우로서는 더더욱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여성 캐릭터는 보조적인 역할,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역할로만 점철되어왔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부흥과 함께 여성 캐릭터도 좀더 현실적이고 주체적이 되어가고 있다. 남성의 시선으로 본 이해 불가한 모습의 여성 캐릭터도 아니고, 남성의 성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도 아니며 꽃뱀도, 창녀도, 신성한 성녀도, 개념녀도, 김치녀도 아닌, 남자와 마찬가지로 똑똑하기도, 지질하기도, 악하기도, 선량하기도 한 한 인간일 뿐인 여성. 퓨리오사 같은 캐릭터, 연홍이나 미옥이 같은 캐릭터, 애비, 에린, 홀츠먼, 패티 같은 캐릭터, 지선이나 한매 같은 캐릭터. 앞으로도 그런 캐릭터를 많이 만나고 싶다. 관객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여자 캐릭터를 쓰기 어려운 시나리오작가, 감독들이 있다면, 캐릭터를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써보시길 권한다. 그것도 어려우면 그냥 남자 캐릭터를 쓴다고 생각하고 써보시라. 그리고 성별을 여자로 바꿔보면 어떨까? 그럼 좋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다. 최근 히어로와 빌런, 그리고 그 주변 인물이 모두 여성인 현실의 드라마가 있었다. 나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싶다.

김꽃비 배우. <질투는 나의 힘>(2002)으로 데뷔해 <똥파리>(2008), <창피해>(2010), <거짓말>(2014) 등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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