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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사진의 털] 부끄러움이 고마움에게
노순택(사진작가) 2017-04-12

2014년 한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나는 작은 화분 하나를 선물받았다. 분홍빛 리본에 ‘축 전시’라는 글씨가 매달려 있었다. 뜻밖의 선물에 몹시 부끄러웠다. 꽃을 건넨 이는 용산참사 유족이었다. 그는 화염이 치솟는 남일당 빌딩의 망루와 참사 뒤 오래도록 방치되었던 잔해를 찍은 커다란 사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다가가 ‘작품’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미술관에 걸려 있으니 소위 작품이라지만, 그에게 그 장면은 깊은 상처이자 5년이 흘렀기에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응시할 수 있게 된 고통일 뿐이었다. 그런 이미지에 작품이라는 기이한 호칭을 붙이고, 어색한 축하를 받으며, 죄송한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른 언어를 알지 못했다. 집으로 가져온 화초는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어쩐지 리본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것은 내 서랍 속에서 쉬고 있다.

지난해 4월, 세월호참사 2주기를 맞아 안산 기억저장소는 3인의 전시를 기획했다. 안산과 서울, 제주를 순회하는 전시였다. 기억저장소에서 만난 단원고 2학년 6반 이영만 학생의 어머니는 내 손을 쥐고는 “작가님 축하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평범한 우애와 연대의 인사였을 뿐인데 낯이 뜨거워졌다. 고통을 품은 전시에 고통의 당사자가 소위 ‘작가’라 불리는 자에게 축하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물며 고마움이라니. 허나 우리는 다른 언어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찍힌 사진 앞에 함께 섰다. 광화문광장에서 삭발하는 모습이었다. 그날 머리를 민 엄마, 아빠들은 모두 울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들도, 그 장면을 찍던 이들도 말을 잊었다. 사진을 한참 보던 영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힘들지만 싸우고 있어요. 힘들겠지만, 계속 기록해주세요.

예전 자료를 찾다가 2015년 용산참사 6주기 전시 장면을 보게 됐다. 나는 이른바 ‘참여작가’였지만, 다른 일 탓에 전시를 보지 못했다. 내 ‘작품’ 앞에서 유족 두명이 끌어안으며 울고 있었다. 이것은 고마운 일일까. 누가 누구에게 고마운 일일까. 혹은 부끄러운 일일까. 누가 누구에게 부끄러운 일일까. 시간이 갈수록, 경험이 누적될수록 나는 더욱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