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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해방과 훼방
김혜리 2017-04-19

<랜드 오브 마인>

<랜드 오브 마인>의 ‘무대’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몇달 후의 덴마크 서해안의 지뢰밭이다. 해방된 덴마크군은 독일 포로의 손으로 독일이 매설한 220만개의 지뢰를 해체한다는 ‘인과응보’ 정책을 세운다. 누구보다 독일을 증오하는 라스무센 대위(롤랜드 묄러)는 본인이 지휘할 지뢰 해체 부대가 아직 성년도 안 된 소년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민가라고는 한채뿐인 망망한 해변에서 보낸다. <소나티네>의 그것처럼 하늘과 바다는 가혹하게 푸르다. 종일 백사장에서 죽음을 어루만지던 소년들은 해가 지면 빗장 질린 오두막에 갇힌다. 툭 터진 자연은 폐소공포증의 극장이 된다. 종전으로 찾아온 해방은 곧 인간성의 해방이 아니었다.

03/17

앞서거니 뒤서거니 국내 개봉한 <러빙>과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초 미국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주를 배경으로 역사를 진전시킨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 걸음을 다룬다. 당사자들의 조용한 일상에 카메라를 고정한 채 실화를 순서대로 따라가는 <러빙>은, 어떤식으로든 관객을 충격하는 순간을 포함했던 제프 니콜스 영화로서는 이례적이다. <러빙>에 대한 혹평 중 “느리면서 농밀하지도 않다”는 비판도 있다. 이해할 수 있지만 동의하진 않는다. 현재까지 제프 니콜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미국의 가족 및 남성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논하는 일련의 시도로 본다면, 이야기의 속도와 밀도에 관한 일반론을 또 하나의 탐색인 <러빙>에 적용하는 일은 부질없어 보여서다. 나의 불평은 훨씬 1차원적이다. 나는 밀드레드(루스 네가)와 리처드(조엘 에저턴) 부부의 가정생활이 덜 이상적으로 그려졌으면 싶었다. 부부의 한결같은 사랑이야 사실이었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언성이 높아지는 일 한번 없다. 접시 한장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정물화 같다. 한데 이것은 솔직히 말해 영화 내적인 결함이라기보다 관객으로서 영화 바깥을 의식하다 떠올린 트집이다. 러빙 부부가 다른 인종간 결혼의 기본권을 쟁취한 근거는 그들이 최고의 사랑과 신뢰를 나눈 커플이라서가 아닌데, 마치 순애보가 권리의 근거인 양 착시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공연히 불안해서다.

미 항공우주국 나사의 초기 우주 탐사 프로그램에 기여한 세 아프리카계 여성들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를 보면서도 유사한 기우가 들었다.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은 유인 로켓 발사 및 귀환 궤도 계산에 합류한 최초의 비백인 여성은 아니었다. 펜타곤 브리핑 참석을 허락받고 나사 내 인종별 화장실을 없애는 데에 이르게 만든 동력은 그녀의 수학적 천재성에 있다. 한편 승진 차별을 받던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은 팀원들과 더불어 컴퓨터 언어를 독학해 본인을 조직에 불가결한 존재로 만듦으로써 주임 자리를 따낸다.

메리 잭슨(저넬 모네이)은 지역 판사의 명예욕을 자극해 엔지니어 자격을 따는 데에 필수적인 백인 고등학교 강좌에 들어간다. 삼인방이 차별과 싸우는 무기는 각각 (지치지 않는 낙천성을 기본으로 깔고) 예외적인 비범함, 조직의 필요를 앞질러 채우는 창의성, 소프트한 협상이다. 영화는 당대의 흑인민권운동을 스케치하지만 세 주인공은 정치적 투쟁에 연루되지 않는다. 도로시는 두 아들을 동반한 도서관 방문길에 시위 대열을 보고 말려들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메리는 물리적 투쟁에 적극적인 남편에게 “모두 같은 방법을 택하진 않아”라고 대응한다. 의도했건 아니건 <히든 피겨스>에서 유능한 소수자 개인의 성취와 차별에 대적하는 집단적 정치운동은 거의 관계를 맺지 않으며 때로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프레임화되기도 한다.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보편적 평등은 일단 이 영화의 시야 밖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러빙>과 <히든 피겨스>를 보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승리에 감동하고 신바람이 났지만, 극적 여운이 각자도생이라는 답으로 뭉뚱그려질 위험에 시무룩해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나라면?”이라고 질문할 때 러빙 부부처럼, <히든 피겨스>의 뛰어난 세 여성만큼 해낼 자신이 없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또한 평등은 개인의 무능과 결함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발판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사회적 약자에게 디딤돌을 제공한다는 의미라고 믿고 싶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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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달 주연한 신작이 개봉하는 배우 한명을 선택해 연기 특성과 매력을 정리하는 ‘월간배우’라는 행사를 한 극장과 2년째 진행하고 있다. 송강호, 메릴 스트립, 이안 매켈런, 이자벨 위페르 등이 주인공이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지금까지 선정된 배우 대부분이 백인이라는 점에 초조해진다. 이달의 배우는 신작 <미스 슬로운>이 개봉한 제시카 채스테인이었는데 그녀의 출연작 가운데 비올라 데이비스, 옥타비아 스펜서 같은 아프리카계 배우들이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헬프>를 복습하면서 그간 쌓인 자괴감이 더욱 무거워졌다. 나는 잠재적 인종차별주의자인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넓은 범위의 백인 배우에게 선택이 집중된 과정을 반성해보면 연유는 대략 다름과 같다. 첫째, 비백인 배우가 주연하는 국내 수입 개봉작이 적다. 표본이 적으므로 완성도 높은 작품도 상대적으로 적다. 둘째, 중국권이나 유럽권에 적용되는 핑계인데 내가 대사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하는 언어가 제한돼 있다. 셋째, 한 배우의 이미지, 연기방법론을 이야기하려면 일정 비중 이상을 차지하는 배역을 맡은 출연작이 축적돼야 하는데 비백인 배우의 경우 커리어가 단절되거나 비슷한 캐릭터에 나를 포함한 국내 관객이 볼 수 있는 출연작이 치중된 경우가 많아 일대기를 포괄하는 그림(career arch)을 그리기 어렵다. 게다가 현실의 문제로 돌아가면 “연기도 많이 할수록 발전한다”는 명제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여성배우, 유색인 배우, 성 소수자 배우는 일할 기회가 적을뿐더러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배우도 스스로의 인종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는 재미없는 인물형을 연기하는 데에 경력을 빼앗겨야 하고 때로는 배역을 ‘극복’하고 연기력을 입증해야 한다. 그동안 훌륭한 백인 배우들은 경험을 통해 더욱 훌륭해진다. 결국 결과물만 놓고 쓰고 말하는 미디어는 백인 및 자국인 배우만 집중 마크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훌륭한 배우의 공급이 부족한가? 아니다. 지금 인기와 존경을 모으는 백인 명배우들은 자격 없는 특권을 향유하고 있나?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이것은 창작자와 수용자 양쪽의 기회 문제다. 우리는 세계에 잠재된 감수성과 재능을 인종적으로 한정된 창을 통해 계발하고 누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다 같이 손해를 보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가 현상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다름아닌 이달의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이 움직이고 있다. 그녀는 몇해 전 <제로 다크 서티>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방송영화평론가협회상, 골든글로브의 연단에서 비백인, 특히 아시아계 영화인, 여성, 소수자 영화인에게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소감을 발표한 직후 언론으로부터 “당신도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한 시스템의 일부다”라는 지적을 받고 제작사를 설립했다. 그녀의 프레클 필름은 우선 모든 구성원이 여성이며, 앞서 말한 소수자 영화인들의 프로젝트에 집중한다는 목표를 가진 영화사라고 한다. “내가 직접 출연하지 않는 작품도 많을 것이다. 이제 나도 플랫폼이 되고 싶다. 케이크를 권하는 손길을 허겁지겁 반긴 적도 있지만 진심으로 그 케이크를 나눠먹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스스로 전형적인 미인이 아니란 이유로 블론드 염색을 권유받으며 30대에 이르러서야 대중 시야에 진입한 채스테인의 출사표다.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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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테(jete)

2012년 1월 24일 영국 로열발레단의 역대 최연소 수석 무용수 세르게이 폴루닌은 돌연 탈단을 선언한다. 다큐멘터리 <댄서>는 피지컬과 개성, 재능을 타고난 이 탁월한 발레리노가 목표를 잃고 방황하다 삶과의 첫 번째 화해에 도달하기까지 과정을 교과서적으로 복기한다. 그러나 대상 인물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 점잖은 영화에도 푹 찌르는 순간이 있다. 2012년 1월 25일 새벽 폴루닌의 친구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이 그중 하나다. 친구들과 본인의 탈단 뉴스를 지켜보고 난 새벽 22살의 수석 무용수는 눈 쌓인 런던 거리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발레 동작으로 도약한다. 평생 처음 자유로워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낄낄거리고 눈밭에 누울테니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폴루닌은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후련해 보이지만,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관객에게도 그가 춤을 멈출 리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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