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스페셜] 전주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특별전 여는 시나리오작가 송길한이 전주국제영화제의 시작을 회고하며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영화의 거리’에 위치한 극장들.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스페셜 포커스 부문의 주인공은 시나리오작가 송길한이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작가 송길한, 영화의 영혼을 쓰다’라는 이름 아래 그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12편의 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다. 1980년대 이후 임권택 감독과 <짝코> <만다라> <길소뜸> 등의 영화를 함께했으며 <우상의 눈물> <안개마을>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온 송길한 작가는 전주국제영화제와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현재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이사장이자 전주국제영화제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의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소회를 전한다.

전주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한국영화의 메카로 불릴 만큼 1950년대와 60년대에 영화 제작의 중심지였다. 지역 영화인들이 설립한 ‘우주영화사’는 이미 영화 제작의 독자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끊어진 항로> (1948), <마음의 고향>(감독 윤용규, 1949), <성벽을 뚫고>(감독 한영모, 1949), <애정산맥>(감독 이만흥, 1953), <탁류>(1954), <아리랑>(감독 이강천, 1954), <피아골>(감독 이강천, 1955), <애수의 남행열차>(감독 강중환, 1963) 등 다수의 영화들이 전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감독 최성관, 1957)도 전주에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빨치산의 시간(屍姦)까지 그린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은 리얼리즘 영화의 백미로 오늘까지 한국영화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필름으로 만든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초청 인사들.

‘전주 얼터너티브 국제영화제’가 될 뻔했던 사연

1999년 당시 우석대학교의 장명수 총장이 이강천 감독의 영화 <피아골>의 제명을 딴 ‘피아골영화제’를 제안했고, 지역의 문화계 원로들도 영화제 기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처음 제안된 피아골영화제는 제1회 ‘전북영화상’처럼 시상식 형식의 소규모 영화제였다. 장명수 총장은 영화제 기획을 전주시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은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간곡한 요청을 수용키로 결정했다. 전주시에서는 영화제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서 공청회를 열고 자문을 구하는 등 절차를 밟았다. 문화계 인사들과 전문가들이 참석한 수차례의 공청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지방에서 성공하기 힘든 시상식보다는 국제영화제가 전주시와 지역민들에게 좀더 가치 있고 의미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영화제 방향 전환에 김은정 기자(당시 <전북일보> 문화부장)와 김소영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등의 노고가 컸다. 1999년 전주시 지원으로 전주에서 국제영화제가 개최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전주시가 국제영화제를 목표로 상향 책정된 당시 예산은 9억7천만원으로 최소 19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분석 결과엔 훨씬 못 미쳤다. 그럼에도 우선 창립 준비를 서둘렀다. 곧바로 이사회가 구성되고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을 선출하고, 민성욱 교수가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영화제의 핵심인 프로그래머는 김소영 교수와 정성일 영화평론가(당시 <KINO> 편집장)가 공동으로 맡게 되었다.

그들은 영화제 명칭을 ‘전주 얼터너티브 국제영화제’로 내세웠으나 필자는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에 부천의 ‘판타스틱’도 낯설어하는데 ‘얼터너티브’(alternative)는 충무로 영화인들에게도 개념이 익숙지 않을 터이고, 대중에겐 친근감도 떨어지고 와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개최지가 전주이니 ‘전주국제영화제’로 쉽게 가자는 필자의 제안에 만장일치로 명칭이 결정되었다.

이강천 감독의 영화 <피아골>.

그렇게 첫 영화제 개막식이 열리고

영화제는 조직이 안정화되는 듯 보였지만 역시 예산 문제가 다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영화제 준비가 난항을 맞아 모두 어려워하고 있던 시기에 당시 한승헌 감사원장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기업의 스폰서 유치를 적극 도와주었고, 예상 이상의 기업들 후원으로 21억원이 넘는 예산을 확보하고 영화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일이 다가왔다. 인파로 가득한 영화의 거리에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 내외와 유현목 감독 등 원로 영화인들과 중견 영화인들이 일렬로 나란히 팔짱을 끼고 보무도 당당히 축하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날 저녁, 드디어 고대했던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식이 메인 상영관인 전북대학교 문화관에서 김완주 시장의 개막 선포와 함께 열렸다. 안성기 배우의 사회로 진행된 축제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 배우,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왕가위 감독, 로저 코먼 감독 등 수많은 국내외 영화인들이 영화제를 축하하기 위해 개막식장을 가득 메웠다. 개막작은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이 상영되었고, 이후 6박7일 동안 23개국 150편의 영화가 다양한 섹션을 통해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단적 러시아영화의 중심인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스톤>(1992)과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 감독이었던 허우샤오시엔의 작품 상영이 기억에 남는다.

헝가리 벨라 타르 감독의 몬스터피스(monster piece, 괴물같은 걸작)로 알려진 <사탄 탱고>(1994)가 심야상영섹션인 ‘미드나잇 스페셜’에 7시간18분 동안 상영되어 전대미문의 러닝타임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B급영화의 대가 로저 코먼 감독의 전주 방문은 밤을 잊은 관객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되고 잠재력과 내공이 출중한 전주국제영화제에 한마디만 덧붙인다. 모쪼록 화끈하고 실속 있는 프로그램으로, 잘해서 오래가는 영화제가 되길 소망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