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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무적핑크의 <벼랑 위의 포뇨> 이래서 지브리는, 사랑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 목소리 출연 나라 유리아, 도이 히로키 / 제작연도 2008년

뜬금포인데요. 저 사주 볼 줄 압니다. 생년월일시 주시면 공부하셔야 하는지, 장사해야 할 팔자인지 봐드릴 수 있어요. 음, 무슨 큰 뜻이 있어 배운 건 아니고요. 2012년이었습니다. 도시농업 웹툰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준재벌 도련님이 강남 한복판 500억원짜리 대지에서 배추농사를 짓는” 웹툰이었는데요. 회색 도심에서 무한경쟁을 하며 지친 등장인물1이 우연히 괴짜 주인공(농부, 부동산 큰손)과 엮입니다. 흙이라곤 초딩 이래 만져본 적 없던 이가 농사를 짓게 되고, 영적 깨달음을 얻죠. “와, 자연은 정말 숭고하구나. 나는 지금껏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지(초롱초롱)!”

사주도 그때 배웠습니다. 새싹이 움튼 컷 하나를 그리려 음양오행을 공부했거든요. 뭐라더라? 농사란 “천지인이 조화하는 숭고한 것”이랍니다. 하루 끙끙 앓다 겨우 한컷 그리고, 논문 무수히 읽고 나서야 사람 하나 그리고. 너무너무 기빨리는 작업이었지만 원래 좋은 건 그렇게 그려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연재하는 반년간 몸이 많이 상했어요. 몰랐는데 마음도.

근데 독자분들이 정말 예리한게요. 작가가 힘들게 작업하면 그걸 똑같이 느끼시더라고요. 웹툰 반응이 영 시원찮았습니다. 소재도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데 왜 재미가 없을까? 누구 탓이겠어요, 길 잘못 잡은 선장 탓이지. 심신소모가 너무 커서 결국 도망치듯 연재를 접었습니다. 시즌2를 기약하기는 했지만, 제 손으로 자식 같은 작품 호흡기를 떼는 건 정말 끔찍했어요. 작은 스트레스에도 맘이 웨하스처럼 바스라졌어요. 파스스…. 그때 본 것이 <벼랑 위의 포뇨>였습니다. 요양하려고요. 지브리는 사랑이죠.

그런데 와. 그 명장면 기억하시나요? 폭풍치는 밤, 여주인공 포뇨가 남주인공 소스케 집을 덜컥 찾아옵니다. 착한 그에게 한눈에 반해서요. 그러자 소스케 엄마 리사는 쿨하게도 아들 썸녀에게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주시죠. 햄 두 조각이 올라간 기름 동동 뜬 라면. 포뇨는 건더기를 죄다 건져먹고는 배불러 푹 쓰러집니다. 그러고는 세상 편히 자요. 쿨쿨. 공자님 맙소사. 보는 내내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그리고 맘이 아팠습니다. 농사 왜 짓나요? 먹으려고 짓습니다. 그런데 제 웹툰 속 캐릭터들은 작중에서 밥을 안 먹더라고요. 아니,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웹툰 내에선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생일이 있었습니다. 1980년 11월 14일, 1992년 8월 11일… 제가 지어줬어요. 살아 숨쉬는 사람처럼 사주팔자가 있었던 셈인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는 걔네 팔자를 꼬아 놨을까요? 영적 깨달음 없이는 밥 한 숟갈 못 뜨도록? 위장에 닿지도 못하는데 심장을 터치할 리는 더더욱 만무하고.

<벼랑 위의 포뇨> 작업 중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단호히 말합니다. “평생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먼저 스토리를 만들고, 거기에 착한 역할, 나쁜 역할을 배치해 제 몫을 연기하게 했다. 근데 이제는 같은 작업 하기 싫다. 하여간 밝고 명랑했으면 좋겠다.” 그러더니 일흔을 앞둔 노감독은 빙긋 웃습니다. “(라면 먹다가 조는 포뇨를 그리며) 아, 졸려, 졸려, 졸려.” 저도 흉내내보려 합니다. 조선시대 임금님들과 실컷 수다 떤 다음에, 지금은 죽어 있는 <경운기를 탄 왕자님> 캐릭터들을 다시 꺼낼 기회가 온다면. “(모내기하다 비싼 슈트 입은 채로 주저앉아) 배고파, 배고파, 새참.” 그땐 여러분 배꼽시계도 울까요.

무적핑크 웹툰 작가. <실질객관동화>를 통해 네이버 웹툰에 최연소 작가로 데뷔했다. <실질객관동화> <경운기를 탄 왕자님> 등을 연재했고 <조선왕조실톡>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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