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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영화비평] 경계를 향한 신동일 감독의 꾸준한 질문 <컴, 투게더>
김태훈 2017-05-18

신동일 감독은 현대사회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병폐에 대해 비판하고 줄곧 그것에 질문을 던져온 작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머리를 깎던 아이가 엄마에게 낮에는 왜 별님이 없냐고 묻자 엄마는 별님이 있긴 있는데 해님이 너무 밝아서 안 보이는 것이며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라고 답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시선 너머>(2011) 중 신동일 감독이 연출한 중편 <진실을 위하여>의 제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신동일 감독은 계속 엉뚱한 것을 보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택한 장치 중 하나는 경계다. 경계의 영역은 양쪽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어느 곳이나 속해 있는 제3의 영역이자 사유의 영역이다. 진실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제3의 영역과 만난다. 신동일 감독의 모든 영화에는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반두비>에서 외국인 노동자 카림은 여권 기간 만료로 죽지만 임금을 받지 못한 카림은 죽지 못해 유령이 된다. <방문자>에서 종교를 이유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 계상이는 감옥에 갇히고 살아 있지만 죽는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죽은 채로 5일 동안 유기된 민혁이는 죽어서도 애도받지 못해 유령이 되어 떠다닌다. <컴, 투게더>에서도 재수생 한나(채빈)는 합격과 불합격의 경계에서 이름을 잃고 예비번호 18번으로 존재한다. 직장에서 잘린 지 일주일도 안 되는 아버지 범구(임형국)도 경계에 있다. 백수지만 윗집을 방문할 때는 양복을 입고 택배가 와도 받지 않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신체성

이러한 경계의 영역은 충동적 도발로도 나타난다. 충동은 본능과 다르며 욕망과도 다르다. 충동은 본능에 기원하지만 사회적 경계의 개념이다. <반두비>에서 고등학생 민서는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 사장 아들의 차에 기름을 주입하다 말고 주유기를 뽑아 그의 얼굴과 몸에 기름을 뿌려대고, 친구가 일했던 회사 사장 집에 들어가 “너 언제 인간 될래?”라며 그의 따귀를 때린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지숙과 밥을 먹던 예준은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달라는 지숙의 부드러운 말에 갑자기 숟가락을 던지며 크게 화를 내다가 곧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컴, 투게더>에서도 범구는 베란다에 있는 꽃들의 냄새를 맡지 못하자 갑자기 꽃들을 다 뜯어버리고 화분을 창문 밖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라면을 먹던 범구는 반찬 냄새를 맡지 못하자 갑자기 냉장고로 가서 반찬을 다 꺼내 싱크대에 버리기 시작한다.

<반두비>에서 보여줬던 신체성은 <컴, 투게더>에서도 이어진다. 외적 자연을 정복해왔던 인간은 내적 자연인 신체도 끊임없이 이성으로 억압하고 희생시킨다. <반두비>에서 카림은 병적 혐오감의 대상이다. 병적 혐오감은 쥐나 뱀같이 죽어도 만지기를 꺼려하는 동물이나 배설물 같은 것들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가게의 점원은 거스름돈을 카림의 손에 쥐어주지 않고 쇼핑 봉투에다 올려놓는다. 신체성은 사유와 합리성으로 통제할 수 없다. 합리성은 그것을 병이라며 제거하려고 할 뿐이고 사유는 절대 이 혐오감을 극복할 수 없다. <반두비>에서의 촉각은 <컴, 투게더>에서 후각으로 이어진다. 냄새를 맡지 못하던 범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한다. 합리성을 부수는 신체성을 통해 감독은 자동화되어 있는 우리의 감각을 깨우려고 한다.

<컴, 투게더>는 버스에 타고 있는 한나의 뒷모습으로 시작해 누워서 비를 맞고 있는 한나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얼굴은 이중적이다. 얼굴은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시선의 장소다. 얼굴은 보여주지만 동시에 감춘다. 우리가 윗사람을 대할 때의 얼굴 표정과 후배를 대할 때의 얼굴 표정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표정 짓지 않아도 얼굴은 이미 무엇을 드러낼지를 알고 있다. 얼굴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그 경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감독은 한나가 힘들게 붙은 대학을 진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마지막 장면, 카메라는 한나의 얼굴을 서서히 들어가면서 보여준다. 한바탕 폭풍을 겪은 한나는 이제 무엇인가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신동일 감독 2기의 시작

이처럼 <컴, 투게더>는 전작들의 맥락을 이어가지만 다른 변화도 보여준다. <방문자>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친구)처럼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작들에서 신동일 감독이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은 바깥이 없이 반복되는 재생산의 구조로 갇혀버린 내재성의 사회 속에서 던지는 타자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반두비>에서는 인종간의 금기,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는 친구의 아내라는 금기, <방문자>에서는 이단이라는 종교의 금기 등 금기를 수반하고 있었다. <컴, 투게더>에서 이제 신동일 감독은 투게더, ‘함께’를 외친다. 전작들에서는 밑에 금기가 깔려 있고 경계에선 유령들이 돌아다니고 그 틈새를 비집고 도발적 충동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화면 가득 리비도는 둥둥 떠다녔고 에너지는 충만하고 힘이 넘쳤다. 하지만 <컴, 투게더>에서는 다르다. 금기는 사라졌고 탄탄한 시나리오에 구조는 안정적이다. 충동적 도발도 줄었고 약해 보인다. 화분 깨는 장면이나 반찬 버리는 장면, 미영(이혜은)이 도로에서 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하는 장면 등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약해 보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리비도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구조의 안정감이다. 만약 <컴, 투게더>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린다면 이 지점일 것이다. 힘이 좀 줄어든 대신 그만큼 원숙해졌다. 그것은 신동일 영화의 변화를 의미한다. <반두비> 이후 8년의 공백기가 있었고 개인적인 시각으로 보면 신동일 감독은 이제 테러리스트에서 에고이스트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객관적 언어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방식을 가지고 적이 원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즉 대상과 싸우는 것을 넘어서 타자에서 우리로 가며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고 유희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을 봐야 알겠지만 그렇다면 <컴, 투게더>는 원숙해진 신동일 감독 2기의 시작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세 식구는 우포늪으로 여행을 간다. 늪은 고체도 액체도 아닌, 고체와 액체의 경계에서 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 비가 내린다. 세 식구는 비를 피하기 위해 달리다가 넘어지고 결국 누워서 비를 온몸으로 맞는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들의 몸을 비는 부드럽게 감싸며 끌어안는다. 비는 경직된 사회를 적시며 변화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끌어안으며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현대사회는 질문이 없는 사회다. 질문하는 자가 답을 알고 있는 사회다.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늘 엉뚱한 것을 볼 수밖에 없다. 질문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신동일 감독은 우리 사회 속에서 줄기차게 질문을 던지고 소통하려는 많지 않은 감독들 중 하나다. 우리는 8년 동안 신동일 감독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 질문하는 자가 많은 사회는 살아 숨쉬는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이런 영화들이 많아질수록 한국영화의 심층이 두꺼워지고 건강해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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