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스페셜] ① “오늘날 정치적이지 않은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 <스푸어>의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7-06-12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에게 ‘여성감독’으로서의 고된 여정에 대해 물었더니 ‘개인사’의 고난을 답변으로 들려주었다. 홀란드 감독의 개인사는 폴란드의 역사, 유럽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 홀란드는 폴란드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8년에 태어났다. 조부모는 게토에서 사망했고, 아버지는 유대인 공산당원이었다. 나치군에 쫓기는 유대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폴란드 농부의 이야기 <전장의 로망스>(1985), 살기 위해 나치가 된 유대인 소년의 이야기 <유로파 유로파>(1990)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서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정체성이 반영된 작품이었고, 이들 작품은 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홀란드는 <올리비에 올리비에>(1991), <토탈 이클립스>(1995), <카핑 베토벤>(2006), <어둠 속의 빛>(2011) 등 소재도 장르도 다양한 작품을 왕성히 만들어왔는데, 정치적 선동영화가 아닌 정치적 개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일관된 시선을 견지해왔다.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작품이자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인 <스푸어>(2017) 역시 마찬가지다. 동물사냥에 반대하는 노년 여성 두셰이코가 동물을 대신해 사냥꾼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인 <스푸어> 또한 정치적인 개인의 삶을 깊은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영화다.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던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을 만났다.

-<스푸어>가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에 수여되는 은곰상-알프레드 바우어상을 받았다. 늦었지만 수상을 축하한다. 의외였던 건 유럽보다 미국에서의 수상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상을 받는다는 건 영화로 인정받는 일이고 영화 홍보에도 도움이 되니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유럽의 큰 영화제에선 상을 많이 받지 못했는데 미국 영화제에선 상을 많이 받았다. 스스로는 유럽인의 정체성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웃음)

-<스푸어>는 폴란드의 여성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가의 작품에 늘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작품들도 영화로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워낙 방대하고 문학적인 소설들이라 영화로 만들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영화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주인공과 주제에 공감하는 지점도 많았고 여러 장르가 섞여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장르의 혼합은 <유로파 유로파>에서도 시도한 적 있지만 그때와는 환경이 너무 달랐고, 이번 작업 역시 여러모로 내게는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두셰이코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은퇴한 건축기사이면서 기간제 영어교사이고 점성술을 믿고 동물을 사랑하는, 노년기에 접어든 여성이다. 소설에서 가져온 캐릭터지만 감독의 실제 모습도 반영됐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두셰이코가 내 세대의 여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68혁명을 경험하면서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결코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자유롭지 않고 너그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세대 말이다. 두셰이코는 포기를 모르는 싸움꾼이며, 세상에 대해 포스트모던한 시각을 가진 인물이고, 조금은 제정신이 아닌 인물인데, 이 세상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한다. 원작자 올가 토카르추크는 산속에 살고 있는 제 이웃의 모습을 이 캐릭터에 담았다고 한다. 100%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캐릭터다. 나 역시 두셰이코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고 내 친구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점성술을 믿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감독의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나.

=그런 의도는 없었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캐릭터다. 캐릭터나 영화를 통해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려고 하진 않았다. 정치적이기보다 오히려 사회심리학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실은, 두셰이코가 젊은 시절엔 독립적이고 활동적이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기술자로서 능력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거다. 우리 세대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 캐릭터는 시대의 한 부분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복수하는 보편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은 <더 파워 오브 더 파워리스>라는 책에서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힘없는 자들의 힘,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힘에 대해 얘기했다. 그 책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이야기가 이 영화에도 담겨있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꾸준히 정치적 목소리를 내왔다.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정치 담론만이 정치가 아니다. 세상은 늘 변한다. 지금의 세상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혁명과 반혁명의 여러 움직임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그로 인해 정치적, 환경적 균형이 깨졌다. 또 전체주의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에선 여성들의 권리가 쉽게 무시되는데, 오히려 그로 인해 여성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여성이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문제 같지만 정치적 이슈로 곧장 연결된다. 그렇다면 이건 정치적인 문제인가, 개인적인 문제인가? 모든 이슈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가능하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의 첫 번째 여성 지도자였지만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이 전국적 반정부 시위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 운동은 정치적 운동인가 도덕적 운동인가. 오늘날 정치적이지 않은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일들이 다른 나라의 정치와 경제와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스푸어>.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면 두셰이코가 동물들이 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하는 태도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폭력 대 비폭력이 아닌 폭력 대 폭력의 구도를 통해 평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는 이야기가 자극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두셰이코가 비폭력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비폭력적 방법이 폭력적 세계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셰이코는 동물들을 대신해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더 큰 폭력으로 폭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게 꼭 비폭력이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클리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클리셰를 뒤집고 싶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 예를 들면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가 그러한 것처럼.

-에코 페미니즘, 동물권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나.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지만 내 삶의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이 많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 비인간적 축산 시스템에 대해서는 반발심이 있었다. 사냥에도 아주 반대하는 입장이다. 단지 인간의 재미를 위해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 속 사냥꾼의 경우 오만한 권력자의 모습을 상징하는데, 그들은 그것이 법이든 자연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영화를 만들면서 에코 페미니즘이나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지금은 육식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실 이 또한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이면서 경제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 육식 소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는 원래 육식 소비를 많이 하던 국가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데 그들이 먹는 고기는 비인간적 시스템의 축산 농가에서 길러진 동물들이다. 인간의 배를 채운다는 이유로 동물들은 고통받아야 한다. 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얘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봤을 때 언젠가 이 사회는 변할 거라 믿는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의 참정권은 보장되지 않았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양육권 보장을 위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권리 보장과 증진을 위해 싸워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동물권도 점점 부각될 것이다.

-여성감독으로서 영화계 내에 자리를 잡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때도 많았을 것 같은데.

=‘이건 꼭 해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강력한 목적의식이 엔진이 되어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다. 그리고 호기심도 많았다. 물론 인내와 끈기도 필요했고. 여성감독으로서의 길도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도 힘든 길을 걸어왔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폴란드 공산정권 시대에 태어나 살았고, 정치적 발언과 행동 때문에 국가에선 나를 적시했고,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프랑스와 미국에서 여성으로 또 외국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나를 도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도 프랑스와 미국과 폴란드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맞다. 그래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일정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영화제에서 많은 배려를 해준 덕분에 서울에 오게 됐는데, 항상 세 나라를 오가느라 이동 중인 삶을 산다. 내 집, 내 침대에서 편하게 몸을 누이는 게 힘든 일이 돼버렸다. (웃음)

-꾸준히 미국에서 영화와 드라마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엔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에피소드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미국에서의 드라마 작업은 어떤 재미와 의미를 안겨주나.

=어떤 면에선 미국의 TV시리즈가 영화보다 더 혁신적이고 제작환경도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제나 소재, 스토리텔링 면에서 개방적이고, 장르도 다양하고 개성 있다. 넷플릭스에서 <하우스 오브 카드>와 <킬링>, HBO에서 <트레메>와 <더 와이어>를 연출했는데 모두 좋은 경험이었다. <트레메>나 <더 와이어>는 각각 뉴올리언스와 볼티모어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데, 이 작품들을 연출하지 않았다면 미국 각 도시의 역사와 문제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없었을 거다. 감독으로서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곧 착수 예정인 차기작이 있나.

=많다. (웃음) 현재 4개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영화가 될 것 같고 나머지는 TV시리즈가 될 것 같다. 어떤 건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는 프로젝트가 될 거고 어떤 건 실험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잘 알겠지만 투자 상황에 따라 어느 작품이 먼저 들어갈지 결정될거다. 지금은 복잡한 단계라 여기까지밖에 말씀 못 드리겠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