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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현실의 불의한 질서를 거역하려 애쓴 <대립군><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노무현입니다>의 아쉬운 점

감독의 이름이 없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립군>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난 후 지난 몇달간 보지 못했던 한국영화들을 몰아보았다. 대다수 영화들이 재미가 없었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은 여전히 감독보다는 스탭과 배우들이 만드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흐름이 극장 흥행으로 검증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순제작비 평균 60억원 이상인 상업영화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는 걸 투자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나같은 평자들에게만 지루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주변의 보통 관객도 한국영화가 이제 별 볼일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최근 개봉한 세편의 한국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노무현입니다> <대립군>에 대해 써보려 한다. 이 영화들은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들인데도 현실의 불의한 질서에 거역하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화면에 심어놓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타일에 관한 자의식이 없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놓고 볼 때 이들 영화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가장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례는 정윤철 감독이 9년 만에 만든 신작 <대립군>이었다. 내가 아는 감독 정윤철은 화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관객이 감각하게 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지닌, 좋은 의미에서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그의 장편 데뷔작 <말아톤>(2005)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주인공이 마라톤 달리기 연습을 하는 범상한 장면에서 그는 장애인 주인공이 느끼는 세밀한 신경의 흐름을 포착해냈다. 주인공들이 집단으로 나오는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각도의 촬영으로 관객의 의표를 찌르면서 상투적인 가족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불운하게 흥행에 실패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7)에선 저 혼자 망상에 빠진 남자의 삶의 트라우마를 초현실적 묘사로 초월 상승시켜 묘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소유자였다.

극적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대립군>

<대립군>에서 정윤철은 이전 영화들에서의 연출 전략과는 정반대의 것을 시도한다. 그는 아마도 역사적 정황에 기초한 이 영화를 어떤 과시적 수사도 배제한 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연출적 결단은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그게 뚝심과 간결함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투박하게 거듭 강조되는 정서적 과잉으로 귀결된다는 게 유감이다. 이 영화는 어린 광해(여진구)가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게 되는 역사적 팩트에 기초해서 소수의 대립군 병사들과 궁궐 식솔들, 대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광해가 임지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로드무비에서 당연히 강조되는 풍경은 광해 일행의 이동경로를 따라 다양하게 자주 바뀌는데 이상하게도 이 로드무비에서의 다양한 풍경들은 어떤 의미와 감정의 지배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감독과 제작진이 자랑스럽게 제작 후기에서 밝힌, 고단하게 실제 장소에서 촬영한 허다한 장면들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좀더 편집되었어야 할 장면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풍경 장면들이 꾸준히 나열되는데 이것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덧대는 효과 이상의 것을 겨냥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을 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장면들은 기이하다. 앞서 등장인물의 감정을 덧대는 배경막으로서의 풍경 효과를 언급했지만, 실제 이 풍경들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상황과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실제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찍어야 사실적인 효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극적 맥락 속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해야 관객에게 사실적으로 다가간다. 나무와 풀이 거센 바람에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이 광해 일행의 이동 행렬이 주는 정서적 느낌과 조응할 수도 있다. 산세가 험하다고 하면 그것이 광해와 민중이 처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또는 풍경 그 자체가 배경에서 튀어나와 화면의 지배소가 되면서 왜소한 인간적 드라마를 거대한 운명의 소실점 안으로 수렴시킬 수도 있다. 이 영화의 풍경 사용법은 그 어떤 것도 아닌 기능에 머물고 있다. 실제 자연의 장소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격심한 물리적 고통을 겪으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적으로 가리킬 뿐 그 이상의 연출적 개입을 자제하고 있는 상태의 화면들이 나열된다.

이것은 정서적 과잉을 의식적으로 누른 연출의 패착이 아닐까. 정윤철은 그가 잘해낼 수 있는 것을 굳이 스스로 억압하면서 극적 맥락의 전개에 꼭 필요한 대화 장면에만 집중하는데, 이게 영화적 묘사를 위한 더 큰 그릇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만다. 이정재가 연기하는 대립군 대장 토우의 감정묘사가 전해주는 파토스는 그리 과한 것이 아닌데도 이 영화에서는 과잉으로 보인다. 그의 거센 눈빛, 얼굴 표정의 변화가 토해내는 감정묘사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다른 부분과 달리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극적 맥락 속에서 드라마를 운반하는 예를 들어보자면, 강가에서 광해 일행이 야영을 할 때 어디선가 빗살같이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모두 당황하는 사이에 광해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토우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광해에게 달려가 그를 구출하려 하자 광해가 공포에 떨면서도 토우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면은 이들 사이에 놓인 계급적 간극을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어린 세자와 어른 군사의 기량 차이를 보여주고 전반적으로 무능한 이 집단의 상황대처 능력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면서 토우가 처한 감정적 딜레마를 거의 완벽하게 전달한다.

각본에서 이미 직설적으로 명기된 주제는 말하는 인물의 헤드숏을 통해 전달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접적이고 세련된 방식을 필요로 한다. 그게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의 매체적 차이일 것인데, 아쉽게도 이 영화는 위에 언급된 묘사방식을 일관되게 추구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묘사된, 광해 일행이 의주에 도착한 후 허름한 성에서 왜군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대규모 전투 장면에서도 감독의 연출적 관점은 인물들의 피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사실적 전투 묘사에만 몰두한다. 이것 역시 액션 안무의 장르적 쾌감을 배제하고 사실적 느낌만 부각하려는 의지의 결과물인데 전투의 경과에 따라 강도가 높아지는 잔혹한 묘사들 외에 과연 더 보여줄 게 없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극적 맥락에 따라 관객이 화면에 보여지길 원하는 것은 변변히 지휘할 장수도 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왕세자 일행과 백성들이 처한 절박한 처지와 그에 따른 교감의 농도다. 이편과 저편의 전략 전술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전투 전에 상황을 예측한 것과 전투 발발 후에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의 간극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이 피말리게 흘러가는 걸 보여주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의 기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정보의 배분과 그에 따른 극적 맥락의 교집합이 없으니 화면에 전해지는 건 죽어가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뿐이다. 이 전투의 무모함과 백성들의 희생이 맺는 상관관계를 축으로 놓고 광해라는 왕세자와 중간자인 대립군 일행, 백성들 사이에 오가는 시선의 교차와 접합이 이 장면에는 적절히 배분되지 않는다.

꼭 있어야 할 묘사가 없음으로 해서 <대립군>에는 직설로 강조되는 좋은 리더의 조건과 민중의 불우한 처지를 보여주는 숏들만 돌출된다. 이것이 미진하다 여겼는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 토우 일행이 왕세자와 백성들의 피난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는 장면은 강가에서 장렬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갑자기 묘사가 종결되는 의주성에서의 전투 다음에 오는 이 장면은 관객을 믿지 못하는 초조한 묘사의 산물이자 우린 좋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제작진의 자기도취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이 영화가 선의를 갖고 제작된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서둘러 주제를 드러내는 강박적인 인물 헤드숏들을 가급적 배제하고 묘사하려는 침착함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이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되는 대립군들의 장렬한 최후는 고통의 퍼포먼스 이상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 나는 현재의 버전보다 훨씬 더 간결한 이 영화의 편집버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필요 이상으로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관객을 못 믿어 자꾸 화면에 대사를 밀어넣으면서도 이렇게 늘어놓는 것이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더 활발히 분비시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자기최면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가 아닐까 의심이 간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고유의 시각적 스타일을 어느 정도 성취한 <불한당>

정윤철의 <대립군>이 사실적인 묘사에의 강박과 주제 전달에의 과신이 결합한 화면 남용의 결과물이라면, 변성현의 <불한당>은 장르 픽션의 상투형을 과신함으로써 실패한 정반대의 사례다. 특히 이 영화의 초반부는 최근 몇몇 영화들에서 허투루 묘사된 교도소 감옥 설정의 안일함 면에서 최절정을 보여주는데 이게 과연 한국의 교도소에서 가능한 상황설정인지를 관객 스스로 자꾸 되묻게 만드는 개연성 무시의 극치다. 교도소 간부들의 묵인 아래 죄수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꾸리는 걸 이해한다고 해도 이 영화는 그 묘사 한계를 한참 넘는다. 공권력의 허술함과 무능을 소재로 삼는 건 대다수 한국영화의 특징이긴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현재의 한국은 공권력의 지칠 줄 모르는 집요함에 지쳐 있던 사회이기도 하다. 평자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관객도 이 점을 그냥 쉽게 넘겨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롯의 소재가 되는 공간은 사실적 개연성 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에 따라 등장인물의 동선과 행동도 정해질 것이기 때문에 플롯의 역동성을 예비하는 측면에서 공간을 사실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제작진의 필연적인 의무다.

이 점을 만회하려는 변성현의 연출은, 비록 그가 SNS에서의 말실수로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완전히 성공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설경구가 그 스스로 잘해낼 수 있는 연기를 무리 없이 해낸 주인공 재호를 묘사하는 여러 장면들에서 감독은 그가 지닌 불안과 그 때문에 지닐 수 있는 강력한 기운을 관객에게 능숙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재호의 클로즈업이 주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은 단지 그 화면의 효과로만 축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클로즈업의 효과를 가능하게 숱한 배음효과를 냈던 여러 장면들의 축약된 효과이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받지도 않았던 개인사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재호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행동을 하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조직과 별개로 마약을 거래하는 다른 조직을 재호의 조직이 습격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가 다른 패의 조직 폭력배들을 상대할 때 그는 자기 몸의 안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폭력의 주고받기를 즐기는 광기를 보이며 카메라는 꽤 긴 호흡으로 인물의 동선을 연출한다. 이런 과시적인 호흡의 긴 연출은 영화 초중반 교도소 장면에서 범죄자로 위장한 현수가 재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시도도하는 가운데 교도소 내 운동장의 분위기를 살필 때도 보여졌지만 그 장며에서는 일정한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실패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면들의 축적은 재호와 범죄자로 위장한 형사 현수(임시완), 재호의 동료인 병갑 등의 관계에 초점을 주는 드라마의 감정선을 예리하게 벼리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믿지 못할 집단 속에서의 불안과 긴장은 이 세 주인공의 내면을 설명하는 주된 감정 통로이다. 변성현은 영화에 허다하게 나오는 몹신에서의 공들인 묘사를 통해 이들 주인공들의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감정을 이중, 삼중으로 두르며 겨냥해낸다. 다소 서투르고 산만하지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고자 하는 스타일에의 야심을 일정하게 성취하면서 이 영화는 호모 소시알의 경계에서 호모 섹슈얼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남자들의 공생 관계와 상호 연민 그리고 증오를 그려낸다. 이게 가능해진 것은 집단에서의 주인공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감독답게 스타일에의 패기를 보여준 변성현의 재능이 그의 설화로 인해 묻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무현입니다>

일회성으로만 유효한 극단적 프레이밍 연출 <노무현입니다>

앞선 두 영화와 다른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이지만 이창재의 <노무현입니다>는 어떤 당파적 입장에서는 선의를 품은 의도로 접근한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아직 중앙무대에 설 위치가 아니었던 정치인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플롯의 주된 축으로 삼았다. 지역감정이라는 망국적 현상에 맞서 동서화합을 내세운 정치인이 색깔론마저 극복하고 대선 후보가 되는 영웅적인 서사가 점차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처럼 주 플롯 사이에는 생전의 노무현의 인간적 면모를 증언하는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끼어든다. 이 인터뷰는 고인이 된 노무현의 삶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영화의 주 플롯인 승리하는 서사와 충돌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비탄의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이창재 감독은 새천년민주당 경선의 실황중계 장면들에서 극영화에서 주로 쓰이는 숏/역숏 문법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노무현이라는 주인공이 고립된 처지를 뚫고 승리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수식한다. 경선에서 상대 후보가 노무현을 비난할 때 노무현이 보이는 반응화면이 실제 맥락에서 따다 쓴 것인지 여부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으나 드라마의 흐름에서 그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우리는 일단 받아들이게 된다. 이 숏/역숏 문법의 기발한 점은 객관성을 가장한 시점에서 화면의 자연화 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극적 동요와 흥분을 느끼는 가운데 관객은 한 정치인이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경선 과정 단락에 끼어드는 인터뷰 화면의 프레이밍 구성이다. 이창재는 이 화면들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앞서 기록화면들을 재구성한 경선 장면들이 극적 감정을 자연화 효과로 북돋우는 것이었다면 이 인터뷰 화면들은 거침없이 들이대는 근접 프레이밍으로 인해 감독의 주관적 개입 효과를 강화한다. 감독은 이 인터뷰 프레이밍과 관련해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효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화면 프레이밍은 지나치게 관객의 이입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노무현입니다>가 흥행하고 있는 것은 노무현의 인간적 면모를 증언하는 관계자들에게 관객이 더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극단적 방법을 쓴 이창재 감독의 프레이밍 연출이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한다.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이 방법은 평자 입장에서 옹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파적 입장을 갖고 노무현에 대한 호불호로 진영이 나뉜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에서 이것이 선동적인 효과를 걸고 내건 도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창재 감독은 지금과 같은 정치적 상황이 아닐 것을 가정하고 지극히 당파적이고 주관적인 이 수법을 썼다는데, 통념상 객관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다큐멘터리를 대하는 관객에게 청한 영리한 일회용 파격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도는 일회성으로만 유효한 측면이 크다.

관객의 개방성을 불신한다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우할 때에도 그 사회의 영화는 미학적으로 진취적일 수 있다. 영화역사의 수많은 사례들이 그것을 증거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영화는 그 정반대의 길을 최근 몇년간 걷고 있다. 정치적 억압이 내면화되어 직설과 과장, 강조가 아니면 억눌린 관객의 감성과 접속할 수 없다고 하는 제작진의 좌절과 불신과 초조가 미학적으로는 점점 퇴보하는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 영화적 성취보다는 데이터를 더 믿고 제작진의 의지보다는 모니터 시사의 설문지를 선호하는 가운데 초래된 한국영화의 획일화는 더이상 감독의 이름으로 영화를 구분짓는 것이 극소수의 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관객의 개방성을 믿지 않는 제작진의 협량함은 거꾸로 대다수 관객의 지속적인 불신을 자초할 것이다.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창의성을 진정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떤 꼴일지 다시 상상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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