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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과 <악녀>의 순진한 허세가 기꺼운 이유
송경원 2017-06-14

똥폼을 즐겨라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착해서 그래.”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이 이 한마디 대사에 녹아내렸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허점이 많은 영화다. 인물들에게 최소한의 동기를 부여는 하고 있지만 동의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렇다고 치고, 빠르게 넘어가는 쪽에 가깝다. 재호(설경구)는 왜 현수(임시완)에게 그토록 관대한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상황 속에서 현수를 버티게 하는 건 무엇인가. 병갑(김희원)은 재호를 좋아했던 걸까, 두려워했던 걸까. 중반 이후 병갑은 재호에게 묻는다. 현수를 어떻게 자기 편으로 만들었냐고. “착해서 그래. 우리 같은 것들이랑은 달라.” 이 대사야말로 <불한당>의 모든 구멍들을 갖다붙여 메울 수 있는 변명이자 장르의 우회로다. 현수는 착해서 범죄자임에도 재호가 보여준 인간미에 반하고, 착해서 어머니의 장례를 도와준 재호를 믿고, 착해서 조직보다는 정을 따른다. 재호는 자신을 믿어주는 현수의 착함에 반하고 상황을 믿지 사람을 믿어본 적 없는 인생에 피로감을 느끼며 현수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 이 영화의 모든 걸림돌마다 ‘그는 착하다’는 마법의 단어로 서사를 편편하게 다진다.

제대로 똥폼 잡는 영화들

여느 영화라면 허술한 이야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의 안일한 해결이라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합적인 인물의 감정을 더듬는 대신 착한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혹은 세상)과의 충돌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불한당>은 반복적으로 상황을 뒤집는 플롯의 기예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장점이 있다’(1109호 안시환 평론가의 <불한당> 비평 ‘스스로를 배신한다’)는 지적은 <불한당>의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정확히 짚고 있다. <불한당>을 지탱하는 건 멜로드라마의 정서다. 액션과 누아르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현수와 재호 사이의 애틋한 감정들이다. 다만 <불한당>은 여기 깊숙하게 발을 담그진 않고 최소한의 감정적 고리로 배치한 후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옷, 그러니까 액션과 누아르라는 장르적 치장에 집중한다. 비유하자면 자신의 매력을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최대한 겉멋을 부리려는 청소년 같다.

재호가 처음 일을 시작했다는 낡은 폐건물은 현수와 재호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믿음의 증거를 나누는 비밀 아지트다. 이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재호에게 현수는 칭얼대며 인사를 건넨다. “이건 또 뭐야. 아주 있는 똥폼을 다 잡고 있구먼.” 내겐 이 대사가 변성현 감독의 자기고백적인 말처럼 들렸다. <불한당>은 있는 힘을 다해 폼을 잡으려고 애쓴다. 때론 본질을 흐리는 과한 치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장르라는 겉모습에 휘둘리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멋있게 보이려고 애쓴다. 결코 세련되었다고 할 수 없는 수미상관의 오프닝과 엔딩, 비현실적인 조명과 멋스러운 공간들은 이를 위해 배치된 직관적이고 영화적인 장치들이다. 여기서 굳이 ‘영화적’이란 말을 쓴 이유는 최근 한국영화가 ‘영화적’이라고 믿고싶은 것들, 그 욕망의 단초를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래 누아르를 표방하는 몇몇 한국영화에서는 자기과시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르에 대한 애정이 읽힌다.

<악녀>를 보며 <불한당>을 떠올린 건 단지 액션을 과장하고 전시하는 태도, 장르의 겹침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두 영화는 액션과 누아르(혹은 이를 흉내낸 뉘앙스)로 요약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두 영화가 나란히 초청된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라는 내셔널시네마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진 좀더 면밀한 분석과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최근 해외에서 한국영화가 아시안 익스트림 무비의 또 다른 전형 내지는 폭력, 액션 장르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사례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이 글에서 파고들고 싶은 건 이와 같이 겉멋에 취한 영화들에 대해 국내 언론과 평단이 아쉬움을 지적하는 방식이다. 박평식 평론가의 <씨네21> 20자평을 빌리자면 <불한당>은 ‘80년대 홍콩 양아치 포스’의 영화이고, <악녀>는 ‘<니키타>의 겉멋 환장 버전’이다. <불한당>과 <악녀>는 평단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영화다. 이야기는 엉성하고, 인물들의 행동에 공감하긴 어려우며, 액션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한마디로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서사의 힘이 부족하다는 게 중론이다. 대부분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전에 쉽게 접할 수 없던 쾌감을 발견한 것도 사실이다. <불한당>은 지난해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를 비롯해 열렬한 팬덤을 형성해 나가는 영화들의 연장에 있다. <악녀>도 비슷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 중이다. <악녀>를 보는 내내 이상하게 <불한당>에서의 두 대사, “착해서 그래”와 “똥폼 잡고 있네”라는 말이 떠올랐다. <불한당>과 <악녀>를 연달아 본 뒤 나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이 영화들의 장점을 되짚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박평식 평론가의 20자평을 그대로 차용해서 말하자면 <불한당>은 ‘80년대 홍콩 양아치 포스’라서 흥미롭고, <악녀>는 ‘<니키타>의 겉멋 환장 버전’이라서 매력적이다. 한마디로 나는 한국영화에서 이 ‘똥폼’들을 좀더 보고 싶다. 한발 더 나아가 이 ‘똥폼’들이야말로 리얼리티가 휘발된 최근 한국영화가 겨우 찾아낸 가냘픈 숨구멍이라고 생각한다.

착하고 순진한 것들만이 살아남는 세계

흔히 착하다는 말은 안일하다, 멍청하다는 말과 곧잘 동의어로 사용된다. 착한 인물의 드라마는 사실 재미가 없다. 그들은 고민하지 않고 정해놓은 결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인물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상대적으로 주변의 세상이 부정한 것으로 대비되기 마련이고, 이 온도 차가 인물에게 연민과 공감의 여지를 준다. 대중 서사에서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선한 위치를 점하는 건 관객을 이야기에 이입시키기 위한 장치이며 선명한 대결구도의 결과로 해피엔딩에 안착하기 위한 포석이다. <불한당>의 현수는 폭력과 부도덕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바로 그 착함과 순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그의 캐릭터는 어머니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압축된다. 재호가 현수에게 끌리는 건 그가 착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살다보니 사람보다 상황을 믿게 된 재호는 현수의 “나는 형 믿어요”라는 대사를 믿고 싶다. 불신과 배신, 악의가 들끓는 세상에서 한줌의 기대를 꽃피운 거라고 해도 좋겠다. 로맨스의 코드가 진하게 묻어 있는 두 사람의 관계는 다분히 전략적이다. 안시환 평론가의 지적처럼 ‘모호성과 중의성’의 영역에서 관객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배우의 팬덤 아래에서 <불한당>의 전략적 동성애 코드는 팬덤의 열광은 물론 인물들의 감정에 대해 이런 저런 해석을 가할 틈을 남겨둔다. 팬들을 위한 일종의 놀이터를 마련해준다고 해도 좋겠다.

동시에 <불한당>은 이미 결말이 정해진 장르 서사다. 악인들은 스스로 행한 죄로 인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장르영화에서 악과 죄를 단죄하는 건 필연이다. 현수의 어머니를 살해한 재호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목적을 위해 이를 은폐하고 동료를 저버린 천 팀장(전혜진) 역시 벌을 피할 수 없다. 오직 재호를 믿었고 임무를 수행했으며 순수를 저버리지 않은 ‘착한’ 현수만이 단죄의 칼날을 피할 수 있다. <불한당>이 철저히 관객의 쾌감에 봉사하는 장르영화인 이유는 기발한 액션 시퀀스 때문도 아니고 폭력의 과도한 사용때문도 아니다. 이 영화가 인물의 죄를 단죄하는 방식이 오직 죽음이라는 손쉬운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살아서 지옥 속을 헤매는 인물의 어둠에 카메라를 오래 멈추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배신과 반전을 거듭하는 장르적 트릭을 이어붙이다 마지막에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평등하게 죽음을 부여한다. 어떤 죽음은 안타깝고, 어떤 죽음은 후련하겠지만 결국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상업, 장르, 대중영화답다. 극장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건 묵직한 질문이 아니라 예쁘고 착한 인물에 대한 팬심과 그가 처한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하지만 그 영역은 어디까지나 판타지의 범주 안에 머물러야 한다. 다시 말해 극장 바깥으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재호와 현수가 사는 불한당들의 세계가 현실을 침범하거나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이 무시무시한 영화를 편안하게 관람하는 건 불가능하다. 살인할 때 눈을 못 쳐다보겠다는 병갑의 너스레와 달리 살인이 밥 먹듯이 편하게 이뤄지고, 동료조차 손쉽게 배신하면서도 잠을 설치지 않는 지옥이 바로 내 옆자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순진한 건지 몰라도 현실이 그만큼 직접적이고 과격하진 않다고 믿는다. 다행히, 그리고 당연히 <불한당>은 출발부터 선을 긋는다. 현수가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시퀀스는 이 영화가 현실을 기반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황량한 벌판에 병풍처럼 늘어선 조폭들의 고급차와 빨간 스포츠카는 이 영화가 허세와 ‘똥폼’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들어간다. 이후 두 인물의 교감을 담는 공간들은 철저히 인물들을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여줄지를 고민한 조명, 배치, 미장센에 집중하고 일정 부분 목적을 성취한다. ‘세상 어떤 교도소에 저런 조명이 있어?’라는 의문이 든다면 <불한당>의 걸음을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고 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재미있지 않아? 애틋하지 않아?’라고 반문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현실 반영을 애초에 배격하고 철저히 판타지에 머물겠다는 태도는 <악녀>에서도 드러난다. 오프닝 10분에 가까운 롱테이크 액션은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여줄 건 이 10분 안에 모두 담겨 있고, 이후 2시간 가까이 이에 대한 설명(혹은 변명)이 이어진다. 숙희(김옥빈)가 왜 이런 살육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회고담이라고 해도 좋겠다. 심지어 영화가 선보이는 액션마저 오프닝 10분의 반복, 변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렬한 오프닝이라기보다는 그게 전부인 영화다. 물론 이 말이 부정적인 맥락에서 읽힐 수 있고, 그게 이야기의 중요성에 천착하는 평단의 대체적인 반응일 것이다. 기본적으론 나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영화라면 모름지기 현실에 발을 디디고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을 이만큼 과감하게 발로 차버린 채 출발할 수 있는 영화라면, 조금은 다른 잣대를 제시해도 좋을 것 같다.

국정원의 비밀훈련장에 끌려간 숙희가 훈련장을 탈출하는 시퀀스는 매우 재미있다. 이 시퀀스에는 여러 가지가 생략되어 있다. 애초에 저런 훈련장이 효율적일지, 어떤 요원들을 육성하기 위한 트레이닝인지 영화는 끝까지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이유 따윈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연기하고, 요리하고, 화장하고, 무용도 하는 여성 요원이란 건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요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이상적인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몇몇 망상에서나 존재하는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악녀>는 이 환상을 리얼리티라는 변명으로 굳이 덮지 않는다. 숙희가 훈련소의 방 칸칸을 헤매는 동안 관객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무장해제가 된다.

물론 이 영화가 현실 기반이 아닌 장르적 과장 속에 있다는 사실의 인지는 초반 액션 시퀀스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드코어 헨리>가 연상되는 1인칭 카메라 시점을 위해 양팔을 앞으로 쭉 내뻗고 내달리는 숙희의 모습은 정확하고 사실적인 액션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게임으로 익숙해진 1인칭 액션의 재현을 위한 부자연스러운 앵글이고 몇몇 물리적 오류나 구멍들을 뭉개고 지나간다. 관건은 ‘얼마나 사실적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흥미롭고 멋지게 보이는가’이다.

<악녀>

없어도 좋은 것들의 몸부림, 잉여의 시선을 통한 발버둥

훈련소의 시퀀스가 특히 흥미로운 건 영화가 재현하는 시공간에 대한 감독의 인식이 단편이나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편적으로 멋지다고 받아들여질 리얼리티가 아니라 감독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조합처럼 보인다. 누군가에는 그것이 <니키타>처럼 촌스런 감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불한당>이 80년대 홍콩 누아르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장르의 짜깁기, 클리셰 덩어리로 보일 수 있다. 이건 철저히 취향의 영역에 머무르는 요소인지라 호오에 대한 판단 역시 관객 각자의 취향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감독의 시점에서 멋지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으고 재현하는 방식이다. <악녀>와 <불한당>은 모두 영화를 일종의 게임으로 보고 한국적인 현실이나 정황들을 굳이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 장르라는 판타지 위에서 뛰어논다. 그 모습이 내겐 마치 자신들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순진하고 순수하게 보였다. 이들 영화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한국적인 현실을 반영하여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는 고민도 없다. 그저 자신들이 잘하는 것,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멋지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꾸민다. 때론 과장하거나 과잉된 표현들도 서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영화의 현실 반영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불한당>은 넘쳐난다. 굳이 없어도 되는 과도한 움직임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액션 시퀀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평범한 드라마 장면에서조차 멋을 부린다. 예를 들어 교도소 보안계장이 재호를 배신하고 패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세개의 창문을 프레임을 내걸고 이를 분할하다. 계장은 재호에게 주먹을 날린 후 제일 왼쪽 프레임으로 벗어난 뒤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고 돌아와 다시 주먹질을 시작한다. 서사적으로 이 장면에서 롱테이크가 필요한가. 아니다. 컷을 나눴어도 하등 지장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굳이 롱테이크를 건 후 프레임을 창문으로 분할하고 인물을 배치한다. 상징과 캐릭터를 부여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명백한 과잉이다. 하지만 그런 허세와 똥폼이 영화 전반을 지탱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한당>의 롱테이크, 1인칭 카메라, 카메라 무빙은 내러티브의 필연이 아니라 할 수 있으니까 시도하는 일종의 똥폼이다.

<악녀>도 마찬가지다. 오프닝의 활극, 오토바이 액션 시퀀스, 대미의 마을버스 액션까지 공간을 유린하는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과 1인칭 시점은 오직 액션(인물의 액션, 카메라의 액션)을 위한 기교들이다. 성패는 둘째치고 합리적인 필요에 의한 시도다. 그런데 감독은 평범한 드라마 장면에서까지 롱테이크를 유지하고 커팅을 최대한 자제한다. 공간을 넘어갈 때 그냥 컷을 하면 되는 순간에도 굳이 프레임을 잠시 창밖에 머물게 한 후 카메라 무빙을 통해 장면을 전환한다. 작가주의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다면 필연인 경우가 많다. 그 장면을 자를 수 없는 내러티브적인 이유가 있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카메라를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악녀>는 굳이 그런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순간에도 장면을 롱테이크와 카메라 무빙으로 이어 붙인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불한당>과 마찬가지로 그게 가능하니까. 그리고 그게 멋져 보이니까. 이런 잉여로운 카메라의 움직임은 명백한 과잉이고 허세다. 그런데 그냥 그게 멋지다고 생각해서, 혹은 할 수 있으니까 시도하는 과잉된 스타일이 일관성을 가지고 유지될 때 어느새 전염이 된다. 그 순진한 허세에 동참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긴다. 나 역시 그중 한명이다.

현실이란 이렇게 넣어야지라고 계산한다고 녹아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 1차원적인 해석에 머물러 ‘현실팔이’를 하는 장삿속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해부터 한국영화에 갑자기 녹아든 재난과 무능력한 정부의 모습들은 그와 같은 단순하고 기계적인 반응(혹은 강박)에 가까웠다고 본다. 반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영화라는 판타지 위에서 뛰어놀고자 하는 영화들의 뻔뻔한 태도는 그 자체가 도리어 한국영화계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영화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역동적으로 변모 중이고 적어도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상업영화에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팔아먹거나 외면하거나. 어느 순간부터 현실을 따라잡는 걸 포기한 영화들이 결국 장르라는 판타지를 탈출구로 삼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밀어붙이는 방식은 팬덤과 동시에 거부감을 낳을 수 있다.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는 감독의 결기로 뭉쳤다면, <불한당>과 <악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다들 좋아해줄 거라는 행복회로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불한당>과 <악녀>의 짙은 장르색은 촌스럽다기보다는 순진하다. 그래서 안쓰럽고 연민이 일고 변명해주고 싶어진다. 반대도 만만치 않겠지만 그게 어디냐는 변명. 스튜디오가 공장처럼 찍어내는 영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감독이 자신의 개성이나 색깔을 드러낼 유일한 지점은 어쩌면 내러티브가 아니라 이토록 노골적이고 과잉된 표현, 액션 정도인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추측. 한발 더 나아가 평자로서 과잉된 행복회로를 작동시킨다면 1950년대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과잉의 수사를 시간이 지난 뒤 이 영화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

감독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기본적으로 나는 카메라의 과도한 움직임과 그에 대한 도취를 불신한다. 같은 맥락에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나 <라라랜드>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제에는 감독의 개성과 취향, 흥을 기꺼워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취향이 반영되지 않는 영화는 심심한 공산품에 불과하다. 다만 앞선 영화들의 경우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면 어땠을까 기대하며 반론을 제기했었다. 언젠가부터 한국영화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공손한 태도로 장르 공식 혹은 흥행 공식이라고 믿어지는 불분명한 대상에 복속하고 있다.

<불한당>과 <악녀>가 걸작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영화라는 하나의 세계의 균형을 염두에 뒀을 때 이 영화들은 명백히 실패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믿고 밀어붙이는 감독의 결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불한당>과 <악녀>에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사라진 순진한 발버둥이 보인다. 현실을 제거하고 판타지 세계하에서만이 허락되는 자유일지언정 나는 이 과잉과 잉여의 수사, 똥폼들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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