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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목소리를 낸다는 것
윤가은(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7-06-15

며칠 전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온갖 스트레스성 병마가 창궐하고 노트북 침수의 변까지 당했지만, 예전보다 두배는 빠른 속도로 ‘끝’을 써냈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대체 왜 이렇게 빨리 쓴 거지? 중요한 문제를 놓친 걸까? 혹 시작부터 뭔가 잘못된 거 아냐?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는 와중에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떻든 내 속에만 품어온 또 다른 이야기를 난생처음 세상 밖에 꺼내놓은 게 아닌가. 또 어떤 격려와 상처를 받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으면서도, 어쨌든 피하지 않고 당당히 뭔가 주장한 거잖아.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늘 엄청난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갑자기 의기충천한 나는 다시 생각이 바뀌기 전에 빨리 나를 칭찬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내게 아주 맛난 크림빵을 사주었다.

빵을 냠냠 먹으며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의 폐막식 기자회견 영상을 보고 있으니 오랜만에 좀 행복했다. 여성 심사위원들이 올해 경쟁작들을 보며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하는 장면은, 올해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대부분 경쟁작들의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에 실망했다는 제시카 채스테인의 발언 이후 아녜스 자우이는 벡델 테스트를, 마렌 아데와 판빙빙은 우리에게 여성 영화인이 더 필요한 이유를 언급했다. 특히 채스테인이 “여성 영화인이 더 많아진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여성 인물들이 영화에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단지 주위 남성들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을 갖고 앞서 행동하는 여성들 말이다”라고 말했을 때는 감정이 고양된 나머지 목이 다 메었다.

사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이번 영화제만의 문제도 아니다. 여성 영화인이 모인 자리에서 지겨울 정도로 자주 거론된 주제고, 여성 영화인이 아닌 누구라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공감하는 오래된 이슈다. 중요한 건, 전세계 영화인과 영화 팬의 애정과 관심을 한몸에 받는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이 이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이다. 마음속에 담아둔 생각을 밖으로 꺼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것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간 품어온 불만과 바람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누군가 나 대신 총대를 메고 공공연한 비밀을 폭로해준 느낌이랄까. 그 감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나는 크림빵을 내려놓고 몇번이나 그 파트를 돌려보며 울컥하고 또 울컥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진심을 담아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것이 누군가에게 또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게도 그 비슷한 기회가 찾아왔으니 한마디 해야겠다. 난 사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열혈 팬이다. 그녀가 소녀 감성 가득한 지나치게 예쁜 영화만 만들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인정받는다는 비판에 강력히 반대한다. 영화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장르가 아닐뿐더러 소녀들 주연의 예쁜 영화를 만들어서 나쁠 건 또 뭐람. 그녀를 지지하는 이유를 백 가지쯤 들 수 있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다만 이런저런 쉬운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와 형식을 꾸준히 탐구해온 그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