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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캐츠 아이
김혜리 2017-06-21

※6월 4일 일기에 <원더우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4주>

임신 기간을 제목으로 삼았다는 점은 같지만 <24주>는 <나인 먼쓰>의 대척점이다. 성공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아스트리드(율리아 옌치)는 행복하게 기다리던 태내의 둘째 아이가 이중고를 안고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24주>는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소중함을 예찬하는 매끈한 휴먼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는다. 남편과 어머니는 긍정적 격려를 보내지만, 매순간 체내에서 아이를 느끼고 출산 후에는 더욱 강력하게 아이의 운명과 연결될 아스트리드는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고뇌 속에 혼자다. 아네 초라 베라헤트 감독은 조산아들이 체감하는 세계와 유사하게 디자인된 병동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시각화한다. 그녀와 아기를 더없이 사랑하는 남편이 동행했지만 그와 유리문으로 분리되자마자 아스트리드는 미지근한 물 같은 적막속을 혼자 걷는다.

06/04

21세기 슈퍼히어로영화에 제3막이란 무엇일까. 7부 능선까지 허방 딛는 일 없이 달려가던 <원더우먼>도 장르의 지병인 시끄럽고 지루한 클라이맥스에 발목을 잡힌다. <원더우먼> 최종 클라이맥스의 첫 번째 문제는 캐스팅이다. 데이비드 튤리스는 대부분의 역할을 훌륭히 연기해내는 일급 배우지만, 신(神)은- 특히 군신(軍神)은-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다. 문제는 단순히 그가 신처럼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앨런 릭먼의 이른 타계가 매우 실용적인 이유에서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마블과 DC 확장 유니버스를 통틀어 로키(톰 히들스턴) 정도를 제외하면 성공적인 악당 캐릭터를 꼽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번 <원더우먼>에서 아레스는 능력의 범위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재미없는 악역이다. 단, 다이애나와 아레스의 대결이 상이한 세계관을 가진 남매의 전쟁이라는 점을 속편이 파고든다면 흥미로워질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둘째, <원더우먼>의 마지막 긴 결투는 비슷한 길이와 파괴의 에스컬레이션 성격을 띤 여타 슈퍼히어로영화의 비슷한 클라이맥스와 비교해도 액션 구성의 밀도가 떨어지고 CG도 조악해 보인다. 셋째, 다이애나의 잠재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방아쇠가 사랑이라는 설정까지는 영화가 내내 그려낸 주인공 히어로의 성격에 부합했으나, 그 사랑의 구체적 대상이 막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여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선택은 “아무리 강하고 똑똑한 아마조네스도 처음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애인에 대한 복수로 세계를 구하는군”이라는 오독을 부르기 십상인 데다가, 앞서 벨기에 마을에서 다이애나와 스티브가 보낸 로맨틱한 하룻밤이 결말의 플롯을 위한 편의적 기획이었다는 인상마저 남긴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아이언맨>(2008) 이후 슈퍼히어로물 르네상스 가운데 처음으로 첫 여성 히어로 단독 영화에 주인공의 섹스 (암시)장면이 포함됐다는 점에는 반감이 없다. 남성 캐릭터에겐 당연한 나머지 생략해도 무방한 부분이지만, 성(性)이 종종 나약해지는 계기로 작용하는 여성 인물에게 있어 섹슈얼리티를 스스로 컨트롤하고 즐기는 모습은, 히어로에 걸맞은 강인함을 완성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일 수 있을 테니까.

06/05

<원더우먼>에는 흥미진진한 뒷얘기가 있을 법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소개에 그치는 두 여성 조연이 있다. 런던의 여성 참정권론자인 스티브의 비서 에타(루시 데이비스)와 치명적 생화학 무기를 개발한 닥터 포이즌(엘라나 아나야)이다. 데미스키라섬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제우스가 모든 존재의 중재자로 점지한 아마존족이 왜 모두 여자여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전쟁과 남성성 사이의 관계를 두고 나올 법한- 즉 조금 진부한- 대사가 생략돼 있다. 아마조네스에 대해서도 신과 인간(man) 사이의 중간적 위치가 강조되고 젠더는 별도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원더우먼>의 관객은 초반 대사 속의 ‘man’이라는 단어를 인간과 남자, 두 가지 의미로 듣게 된다. 아무래도 패티 젠킨스 감독은 들려주기보다 보여주기를 택한 듯하다. 영화에서 다이애나가 성 평등을 역설하는 대사가 없는 까닭도 데미스키라의 딸인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상식이기 때문이라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아마조네스의 사회가 어떻게 통치되고 운영되는가를 따로 설명하는 시퀀스도 없지만 왕 히폴리타(코니 닐슨)와 장군 안티오페(로빈 라이트)가 다이애나의 교육을 놓고 이견을 해소해가는 방법은, 여성 멤버가 다수인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유연한 방식이다. 그나저나 <글래디에이터>에서 두 남성 라이벌 캐릭터와 삼각관계의 꼭짓점을 이뤘던 우르술라 공주 역의 코니 닐슨과 <프린세스 브라이드>에서 원형적 프린세스 버터컵 역을 맡았던 로빈 라이트가 원더우먼 다이애나의 양육자라니 자못 훈훈하다. 슈퍼히어로영화의 또 다른 프리퀄을 보고 싶어지다니 믿을 수 없지만, 안티오페와 히폴리타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나는 두근거리며 극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06/10

자극적 섹스를 나누는 커플의 신음으로 들렸던 음향이, 화면이 밝아지면 성폭행에서 비롯된 소리로 판명된다. 여인의 유일한 동거자인 회색 고양이는 룸메이트를 보호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없이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고양이의 담담한 태도와 괴한이 사라진 후 폭력의 잔해를 치우는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침착성 탓에 관객은 혹시 합의된 사도마조히스틱한 유희였나 다시 한번 의심해보지만 <엘르>의 충격적 오프닝은 실제 주거침입 강간임이 드러난다. 호되게 시작했으니 더 견디기 힘든 신은 없으리라는 기대도 무색하게 폴 버호벤 감독은 두어 차례 최초의 폭행 장면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로 관객 앞에 재현되는 성폭행은 다른 앵글로 찍혀 있으며 이번에 우리는 보다 성공적으로 저항하고 마침내 둔기로 범인의 머리를 후려치는 미셸을 목격한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우리는 방금 장면이 본인이 희생된 경험을 곱씹으며 다른 결말을 상상하는 미셸의 백일몽이었음을 발견한다.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입꼬리에 단 위페르의 손은 유일한 증인인 고양이를 안아 올린다. “눈을 뽑진 못해도 할퀼 순 있었잖아?” 그녀의 책망은 마치 왜 쥐를 놓쳤냐고 묻는 듯 가볍다. 거기에는 삶에서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하지 않는 인물의 차가운 표표함이 있다. 특기할 사항은, 영화의 도화선인 강간의 묘사와 재연에서 고양이 마티는 줄곧 구두점 노릇을 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최초 숏은 폭행을 목도하는 마티의 클로즈업이고 나중에 우리는 고양이의 외출이 문단속을 풀었음을 알게 된다. 사건 후 미셸의 회상도 마중나온 마티의 야옹거림에서 촉발돼 고양이로 끝난다. 며칠 후 창문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는 다른 종류의 ‘유혈’로 이어지는데 이 경우 범인이 섰던 가해자의 자리에 고양이가 있다. 요컨대 이 고양이는 강간범의 침입에 빌미를 제공했으나 그로 말미암은 사태에 개입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감정이입하지 않고 때로는 잔혹하다. 이쯤되면 이 고양이야말로 감독 폴 버호벤의 얼터 에고가 아닌가 싶다. 결정적으로, 마티는 많은 것들을 영화로 물고 들어오지만 결국 이자벨 위페르의 무릎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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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까지 갈 것 없이

다큐멘터리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한국, 일본, 대만의 길고양이, 그리고 그 길에 함께 사는 사람들을 찾아간 기행문이다. 대만과 일본의 길고양이들은 도로 위에서 그루밍을 할 만큼 여유롭지만, 한국의 고양이들은 인간을 겁낸다. 자연히 세 나라의 동물보호 활동가들 가운데 가장 고되고 절박해 보이는 사람들도 한국의 구조자들이다. “사랑할 필요 없어요. 공존만 해도 돼요.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더라도 때리거나 쫓아내진 말아주세요.”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3국의 고양이 길집사들은,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감상적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길짐승을 사랑하긴 고사하고 좋아하는 것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다 편하려면 좋아하는 쪽에서 더 애써야겠죠.” 일본의 한 자원봉사자는 말한다. “인간도 그렇지만 생명은 그냥 내버려두면 죽잖아요.” 방치하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쇠하고 사라진다. 존재를 그저 지속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환경을 인류 위주로 재편해버렸으니 공존을 위한 수고의 책임은 인간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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