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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는 모른다
문강형준(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7-06-22

예술의 윤리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결단코 타인을 알 수 없음을, 혹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들도 알지 못하게 되었음을, 혹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 다시금 모르게 되었음을 깨닫는 것. 모든 위대한 예술은 우리를 ‘모르게’ 만든다. 즉 지금껏 당신이 알고 있던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은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우쳐준다? 최근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을 다시 읽으며 소설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인종주의자로 찍혀 사임한 백인 노교수 콜먼 실크가 자신이 실은 하얀 피부를 가진 흑인이라는 진실을 밝히지 못했음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를 진짜 ‘알고’ 있는가? 이 소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이 폭력이 ‘정치적 올바름’을 등에 업는 경우, 자연스레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 좋지만, 오직 한 군데에서 틀렸다. 타인이 옳은지 그른지 ‘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에서 비판 받을 수 있는 행동들이 있지만, 사실 그 행동 이면의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정치적 올바름은 이 ‘아무도 없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개인의 진실을 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정치적 올바름과도, 나아가 사회 전체와도 근본적으로 불화한다. <휴먼 스테인>과 묘하게 닮아 있는 아르기리스 파파디미트로풀로스 감독의 영화 <선탠>(2016)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중년의 못생긴 남자 의사가 관광 온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빠져들며 소외되고 망가져가는 과정을 그린이 영화에서 여자를 마취시킨 채 납치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만약 이 놀라운 영화가 그렇게만 평가된다면 그것은 나이와 외모와 성차와 힘과 욕망의 간극에 대해 사유하는 이 영화의 다른 모든 빛나는 면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 시대에는 예술이 사회와 맺는 이 ‘불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소설과 미술과 영화가 쏟아져나온다. ‘이것이 진실이고, 이것이 착한 것이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눈물 흘리며 외치는 작품들. 그러한 작품들이 다 가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른 것에 대한 비판’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예술은 모두가 다 안다고 소리칠 때 한켠에 비켜서서 우리에게 모르는 구석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예술이 권력에 봉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권력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외치는’ 속성이 있다면(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지식’과 함께한다), 예술은 정확히 그 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자리. 그곳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자, 배제된 자, 이해받지 못한 자, 공격받는 자의 보이지 않는 속살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예술이 언제나 가장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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