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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만화방] 고바야시 마코토 <다 덤벼>
오승욱(영화감독) 2017-06-29

재밌는 것만 그리지 뭐

<다 덤벼>

만화 카페라는 곳이 있다. 만화책을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볼 수 있는 데다 음료수와 주전부리까지 옆에 두고 내 집보다 더 편하게 원하는 만화를 골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실내 공기도 쾌적하고, 분위기도 좋다. 20여년 전, 만화방에서 라면을 끓여준다는 것이 놀라웠던 그 시절 만홧가게에서는 오뎅 국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구릿구릿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밴 만화책을 어둠침침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보던 경험을 이야기하면 ‘저 꼰대 놈이!’ 하면서 아무도 상대 안 해줄 것이다.

만화 카페의 주인들이 만화 애호가들이 분명한 것처럼 그 옛날 만화방과 만홧가게 주인들도 만화 애호가들이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30대 중반이었던 때, 동네 상가 안에 있던 만화방의 주인은 후덕한 몸에 인상 좋은 30대 중반의 아줌마였는데, 그녀의 만화방에는 손님들의 손이 닿지 않는 책장의 맨 위칸에 자신만의 명예의 전당이 있었다. 맨 위칸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에어리어 88>을 꺼내달라고 하자 미소를 지으면서 “그 만화 걸작이에요” 하며 기분 좋게 꺼내주던 모습이 생각난다. 애호가 특유의 수다도 없고, 잘난 척도 없는 소박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소녀만화뿐만 아니라 소년만화들까지 두루두루 좋아했는데, 뭘 빌려볼까 한참을 서성이는 나에게 만화가 고바야시 마코토의 <다 덤벼>를 권해줬다.

고바야시 마코토의 <다 덤벼>를 펼쳐들었을 때,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다 덤벼>의 주인공 산시로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일본의 주간 만화잡지 <소년 선데이>에 새로 연재를 시작한 만화 <1.2의 산시로>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은 나이의 주인공 산시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어 첫 등교를 하는 것이 만화의 첫 장면이었다. 10여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산시로가 성인이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가 <다 덤벼>였는데, 엄밀히 말해 만화 속 주인공이 30대 중반은 아니었지만, 나는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만화를 보다 주인공과 처지가 비슷한 것 같아 마음이 짠해지기까지 했다. <1.2의 산시로>는 럭비부에서 운동을 시작한 산시로가 지상 최강의 남자가 되려는 단순무식한 꿈을 가지고 유도로 전향하고 마지막에는 레슬링으로 종목을 바꾸며 또래의 지상 최강의 남자가 되려는 소년들과 티격태격, 좌충우돌하는 반스포츠 만화, 반슬랩스틱 코미디 만화였다. 산시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레슬러가 되면서 <1.2의 산시로>는 끝을 맺는다.

산시로에서 나를 보다

<다 덤벼>의 시작은 미국에서 활약하는 악역 일본인 프로 레슬러 번개맨이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돈 버느라 사용한 악역 간판을 벗어던지고 정통파 레슬러로 일본에서 멋지게 복귀하려는 부푼 마음으로 비행기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일본 공항에 내려 고등학생 때부터 싸우면서 정이 들어 결혼한 아름다운 아내 지나와 만나 격한 포옹을 한 후, 아내에게 들은 일본 프로 레슬링계에 대한 이야기는 참담했다. 산시로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프로 레슬링 단체가 흥행 참패로 사라졌고 단장은 돈을 떼 먹고 도망쳤으며, 소속사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레슬링의 시대는 가고 격투기의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미국에서 번 돈이 있는 산시로는 “그럼 뭐” 하면서 레스토랑의 점장이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 과거 레슬러였던 자신을 숨기다 그의 오랜 팬에게 들켜 레스토랑 종업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는 장면이 있다. 왜 레슬링을 그만두었는지 그동안의 사정을 알려달라고 하자 산시로는 “설명하자면 길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종업원이 “길어도 상관 없어요, 이야기주세요”라고 하고 산시로가 “긴 얘긴 잘 못해”, 종업원이 “그럼 줄여서 이야기해주세요”, 다시 산시로가 “줄여서 얘기하는 것도 못해”라고 하고 종업원이 “진지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우리 모두 점장님 편인데”라고 하자 산시로는 “진지하게 얘기하는 걸 제일 못해”라고 한다. 종업원이 “그럼 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어요”라고 말하자 산시로는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든다.

친구들에게 지상 최강의 단세포 두뇌라 인정받은 산시로가 제일 잘하는 것은 바로 주먹질. 레슬링을 안 하겠다는 산시로를 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지상 최강의 남자는 산시로가 아니다’라는 한마디면 불끈하고 돌아온다. 한마디로 단세포 바보인 셈. 만화의 가장 최강의 장면은 산시로에게 ‘당신보다 내가 더 최강’이라며 도발한 격투기 챔피언과 대결하기 위해 산시로가 브레인버스터를 연습하는 모습이다. 격투기 선수와 싸우는 필승의 전략은 아무리 약점이 많다 해도 레슬링의 꽃인 브레인버스터여야 한다는 것이다. 조감독 시절 웃을 일이 없던 나는 이 만화를 위안으로 삼았다. 그 후 나는 산시로와 또 한번 만나게 된다. 40대가 되었을 때, 나이가 들어 레슬링에서 은퇴한 산시로가 지상 최강의 단세포 두뇌를 가진 주제에 탐정이 되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격투 탐정단>에서였다. 세 번째 만난 산시로도 별 볼일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신세였고 나 역시 비슷했다.

<다 덤벼>

인기란 알 수 없는 일

이시카와 준의 만화 에세이 <만화의 시간>에서 고바야시에 대한 글을 보면 고바야시 마코토가 <1.2의 산시로>로 데뷔했을 때 이 풋내기 신인에게 주어진 찬사와 인기는 대단했다. 그해 일본의 만화상을 모두 휩쓸었다. 그의 만화에는 1970년대 일본 소년만화들의 그림체와는 다른 프랑스 만화나 워너브러더스 애니메이션 그림체에 가까운 독특함이 있었다. 눈과 입의 움직임을 과장되게 그려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는데 이전 일본 소년만화에서 이런 표현은 없었다. 데뷔작으로 성공한 그는 이제 만화가로 평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껏 고무된 그는 더욱 정성을 들여 데뷔작보다 그림도 훌륭하고 재미도 있는 후속작을 자신 있게 내놓았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연재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별 볼일 없는 만화가가 되어 인기를 되찾으려 온갖 시도를 하지만 데뷔작의 인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심심풀이로 아주 가볍게 고양이 만화를 만화 잡지가 아닌 생활 잡지에 그렸다. <왓츠 마이클>이었다. 춤추는 고양이를 그린 이 만화는 일본을 들썩이게 했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졌다. 고바야시 마코토는 이시카와 준과의 대담에서 이 작품이 왜 히트 만화가 되었는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다 덤벼>에는 “정말 인기란 알 수가 없는 일이야. 그럼 내가 재미있는 것만 그리지 뭐!” 하는 만화가의 마음이 들어 있다. 주인공 산시로가 폐차장에서 오토바이를 들어 바닥에 내리꽂으며 브레인버스터를 연습하는 장면은 만화가가 가졌던 암담함과 쓸쓸함을 불태워 만든 장대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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