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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토마스 크레치만 - 독일인이 아닌 세계인으로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7-08-03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기록한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장훈 감독은 힌츠페터를 바탕으로 만든 독일 기자 ‘피터’ 역할을 맡을 배우로 토마스 크레치만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2002)에서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연주를 듣고 그를 살려주는 독일 장교 호젠펠트는 참혹한 전장에서도 지지 않은 인간애를 상징했다. <택시운전사>에서 배우 송강호와 호흡을 맞춘 그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작품 속 각인된 제복의 이미지 대신 편안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 그는 격의 없는 대화 사이로 작품을 대하는 자신의 방법론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을 찾아봤더니 <택시운전사>의 배우들과 촬영장 뒤의 모습을 열심히 찍더라.

=인스타그램은 4개월 전쯤 시작했는데,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은 것처럼 재밌다. 사진들은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거다. 촬영 때 장훈 감독을 비롯해 배우들 사진을 많이 찍었다. 송강호 배우의 근사한 사진도 많다. 오늘 찍은 사진도 있다. (송강호, 유해진, 장훈 감독, 박찬욱 감독 등을 찍은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주며) 장훈 감독 사진은 진짜 마음에 든다.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다. 박찬욱 감독이 촬영장에 왔었는데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하고 싶다. 박찬욱 감독도 내 마음을 잘 안다. 그래도 기사에는 쓰지 말기 바란다. (웃음)

-<택시운전사>에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처음 에이전시에서는 좀 힘들 것 같다고 답변했다가 이후 출연하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다.

=에이전시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나는 몰랐다. 조금은 과장되게 전달된 면이 있는 것 같다. 에이전시에서 한국영화 대본이 들어왔는데 한번 읽어보겠느냐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바로 감독과 미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장훈 감독이 LA에 와서 영화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해줬다. 감독을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이 영화는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지점이 가장 크게 와닿았나.

=사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이 놀랐다. 영화 출연을 계기로 알게 됐고, 널리 알려야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선택한 건 대본의 힘이 가장 컸다. 대본을 보면 이 영화가 완성됐을 때 보고 싶은 영화인지 아닌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기술적인 부분이나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항상 대본을 보고 작품을 결정한다. 내가 맡을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라는 캐릭터가 어떤지는 그 후의 문제다. 내 역할이 어떤 캐릭터인지보다 전체 대본이 어떠냐가 중요한 문제다.

-힌츠페터 기자는 2016년 1월 고인이 됐다. 그분을 생전에 뵈었나.

=실제 그에 대해서 몰랐고, 배경지식이 없었다. 그분이 생존해 계실 때 알았으면 만났을 텐데 불행히 너무 늦게 알았다. 이후 그분의 미망인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과도하게 그에 대해 알아보고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기보다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는 책임감도 크고, 그 사람의 이미지나 삶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꼭 만나야 한다기보다 배우로서 다른 접근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만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연기자는 대본으로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본다. 아, 그런데 고인의 미망인에게 남편 역할로 출연해주어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 무렵 남편이 꿈에 나왔다고 하더라. 그런데 꿈속의 남편 얼굴이 내 얼굴이었다고 하더라. (웃음)

-힌츠페터 기자는 만섭(송강호)이라는 평범한 소시민이 변화하는 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대화보다는 사소한 눈빛과 표정, 동작으로 서로 소통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왜 그렇게 대사 없이 감정이 과하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배우 송강호는 환상적인 배우다. 함께 연기하면서 그가 행동이나 표정 하나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이 지점이 연기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사건에 대해 느끼는 것이 같기도 하지만, 피터와 만섭은 서로 그걸 다르게 받아들이고 표현해야 했다. 그 부분을 송강호와 나의 케미스트리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주어진 대본 안에서 우리 모두 열심히 노력했다.

-연기의 기술 말고 더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웃음) 지난해 여름 촬영장의 더위가 이 영화 제작의 큰 ‘고비’였다고 들었다. 배우들에게 트레일러가 제공되는 할리우드의 촬영 여건과 한국의 환경은 사뭇 달랐을 텐데, 한국에서 촬영하는 건 어땠나.

=얼마나 더운지 모르고 한국에 왔다. (웃음)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작은 트레일러가 있어서 에어컨이 설치되는데, 여긴 그런 편의는 없으니 배우와 스탭 모두 더위에 무척 힘들었다. 금남로 오픈 세트 촬영 때는, 한 바퀴 돌고 나면 너무 더워서 옷을 다 갈아입어야 했다. 똑같은 옷이 몇벌씩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내 카메라에, 촬영하다 잠시 휴식할 때 송강호가 더워서 바지를 내리고 쉬고 있는 사진이 있다. 정말 재밌는 사진인데 절대 공개 못한다. (웃음) 촬영 장소를 매번 바꾸는 것도 힘들었다. 며칠마다 다른 도시에서 촬영했다. 서울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전국을 다 돌아다닌 것 같다.

-당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 속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다. 할리우드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겨울 전쟁>(1992), <U-571>(2000), <작전명 발키리>(2009) 등에서 제복을 입은 장교 전문 배우로 각인됐다.

=어떤 댓글을 보니 ‘토마스 크레치만은 장교 아니면 나치, 아니면 나치 장교만 연기한다’고 하더라. 나치 장교 역으로 유명한 건 맞지만 그런 역할만 한 건 아니다. 1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독일인으로 나온 영화는 13~15편이다. 하필 그 10여편이 흥행작이긴 하다. (웃음) 결국은 출신 배경 때문이 아닐까. 전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한 할리우드 대작에는 독일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다. 그중 50% 정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고 나치 독일을 다룬다. 할리우드에서 잘 알려진 독일 배우를 캐스팅하는 거다. <택시운전사>도 힌츠페터 기자가 독일인이고, 그래서 내가 캐스팅 물망에 오른게 아닌가.

-수영 선수였다가 19살 때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던 중 손가락이 부러져 선수의 꿈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나는 전에 한번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수영 선수였고 그 10년 동안 하루에 20km씩 수영을 하며 살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건축설계사가 되는게 꿈이었다. 동독에서 탈출하기 전에 내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건축설계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독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던 때였고, 생존을 위해서 20대에 결국 배우의 길을 택했다. 1990년에 베를린에 있는 극장에서 처음 연극을 했는데 그 작품이 <스탈린그라드>였다. 그때 연기의 잠재력을 알게 됐다. 한마디로 연기의 맛을 본 거다. (웃음) 그리고 이후에 러시아 버전의 <스탈린그라드>(2013)를 다시 연기했다. 독일 버전과 정확히 반대의 관점에서 스탈린그라드를 표현한 거다. 같은 제목의 영화를, 다른 나라에서 제작하고 그 두 영화에 모두 출연한 배우는 나밖에 없을 거다. 하나의 사건을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설명한 것이다.

-시대극에서 벗어나 최근엔 <킹콩>(2005), <원티드>(2008),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시간 배우로서 많은 배역을 연기해왔다. 실존한 장교(<피아니스트>)도 연기했고, 교황(<해브 노 피어>(2005)), 연쇄살인자(<그림러브>(2006)) 역할도 했다. 역할이나 직업은 달라도 늘 동일한 방법으로 최대한 그 인물을 표현하려 노력해왔다. 최근엔 대니얼 래드클리프와 호흡을 맞춰 <정글>이란 영화를 찍었는데 미치광이 납치자로 나온다.

-독일을 떠나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거주하며 활동했고 지금은 LA에서 생활한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원이 완성된 거다. 전세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국가가 존재하고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나는 독일 출신이지만 독일인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보다 나는 세계인이 되고 싶다. <택시운전사>라는 한국 작품에 참여한 것도 그런 내 마인드를 상징하는 작품이자 내 연기 생활의 성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일을 하면서 감독, 배우, 스탭들이 손을 잡고 같은 주제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작업을 경험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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