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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시대의 서사
문강형준(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7-09-14

서사에도 우세종이라는 게 있다. 아마도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히 만들어지는 서사 중 하나는 아마도 ‘파국서사’(catastrophic narrative)일 것이다. 파국서사란 현재의 문명이 몰락해가는 과정(아포칼립스) 혹은 문명 몰락 이후의 세상(포스트아포칼립스)을 다루는 서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영미권에서 2001년 9·11 테러 이후 급증했던 이러한 경향이 전세계로 퍼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에서도 <서울>(손홍규), <날짜 없음>(장은진), <해가 지는 곳으로>(최진영) 등의 소설이 발간되었고, 지난해 개봉한 최초의 한국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은 크게 흥행하기도 했다.

파국서사가 우세종이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서사가 기본적으로 현실과 미메시스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파국서사의 유행은 세상 자체가 파국의 기미를 크게 보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개념이 ‘인류세’(anthropocene)다. 2000년 파울 요제프 크뤼천이라는 대기화학자가 지구 환경에 인간이 남긴 강력한 자취를 가리키는 지질학상 명칭을 고안해낸 것이다. 인류세는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지구 생태계가 경험한 바 없던 변화를 만들어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합성 유기화합물, 방사능 등 완전히 새로운 물질의 확산, 대기 순환의 문제에서 생기는 온난화와 재해 등은 대표적이다. 지금껏 지구가 겪은 다섯번의 대량멸종 이후 이제 여섯 번째 대량멸종이 생겨날 것이고, 그 멸종 속에 인류가 포함된다는 예상은 이론을 넘어 사실에 가깝다.

맷 리브스 감독의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가장 최근의 할리우드 파국서사다. 인간의 발달한 과학기술에서 기인한 변종 바이러스가 인간과 유인원의 우열관계를 뒤집는 1편과 2편을 지켜보던 우리는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이르면 차라리 인간이 사라지는 게 지구를 위해서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유인원 무리의 대장인 시저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그에 대적하는 인간들이야말로 동물적으로 느껴진다. 증오와 폭력에 물든 인간들이 전투를 벌이며 살육하다 산사태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오직 유인원들만이 살아남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으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취약하기만 한 인간의 존재론적 상태를 보여준다. 여섯 번째 멸종에 대한 영화적 은유랄까.

인간은 스스로를 ‘상대화’하는 놀라운 이성을 발전시켰지만, 인간 자체의 절멸까지를 상상하는 상대화 능력은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이다. 파국서사는 ‘인간 이후’, ‘휴머니즘 이후’를 전제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상상력을 통해 현재의 인간과 문명을 성찰한다. 파국의 기미가 더 분명해질수록 파국서사는 더욱 많아지고, 더욱 급진적인 깊이를 획득할 것이다. <혹성탈출>과는 달리, 파국을 다룬 한국 소설과 영화가 몰락의 소재는 가져오되 사랑과 희망 등 여전히 익숙한 휴머니즘적인 요소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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