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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배우 설경구 - 바뀌었다 또 바뀔 것이다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17-09-14

얼굴은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첫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정보를 상대에게 전달한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그 세월의 흔적, 삶의 형태들을 얼굴에 담아 전달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를 통해 평범하지만 강렬한 삶을 담아냈던 설경구는 꽤 오랫동안 강철중의 얼굴로 살아왔다. 한국영화사를 뒤져봐도 기념비적인 캐릭터임에는 분명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강철중의 변주를 즐겼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그가 다시 새로운 얼굴들을 보여주고 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에서 ‘멋짐’을 뽐내며 순식간에 팬덤을 형성하더니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메소드 배우의 대명사였던 진가를 새삼 증명했다.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을 알게 된다는 50대의 입구에서 배우 설경구는 매 작품 새로운 얼굴로 발견되는 중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응원하기 위해 팬들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매번 긴장된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이후 표현도, 응원도 이렇게 적극적인 팬덤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힘을 받는다. 팬들이 관객과의 대화(GV)나 행사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직접 하기도 하는데 사정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려 한다. 팬 카페는 원래 예전부터 있었지만 한동안 조용하다가 최근에는 1분에 한명씩 가입한다고 농담을 주고받는 중이다. 50을 넘어선 나이에 이런 팬덤을 접할 거라곤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웃음)

-<불한당> 이후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불한당>의 한재호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다가 배우 설경구를 발견한 분들이 과거 영화나 인터뷰도 다시 찾아본다고 들었다. 발견이라고 부르고 싶은 게 나도 몰랐던 예전 인터뷰와 사진들을 꼼꼼히 찾아서 서로 공유하는 거다. 옛날에 성의 없이 찍었던 사진들이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옛날에는 연기자가 연기만 잘하면 되지 뭘 꾸미나 하는 쑥스러움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꽤 길어서 집에 있는 것들을 대충 입고 찍은 사진들이 마구 올라오는 걸 보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웃음)

-예전에 비해 최근에는 옷차림이나 사진 찍는 것들을 의식하나.

=의식하게 된다. 촬영장에서는 몰라도 행사에서는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불한당>이란 영화가 여러 가지로 내게 변화의 계기가 됐다. <불한당>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처음엔 양복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하지 않으려고 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 같고, 불편하고. 그런데 <불한당> 이후 시사나 행사에서 슈트를 넉달 정도 입다보니 몸이 익숙해지더라. 오히려 고민하지 않고 교복처럼 입을 수 있어서 편하다.

-촬영은 <불한당>보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먼저 마친 걸로 알고 있다.

=맞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찍는 중에 50살이 됐다. 그런 점에서 <불한당>과 <살인자의 기억법>은 전혀 다른 영화지만 같은 시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들이다.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도 신중하게 고른다고 고른 거였는데 지나고 나니 고민을 깊게 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었다. 또 하나 끝났구나, 또 하는구나 하면서 몇 작품 중에서 하나 고르고. 혼자 시나리오에 꽂혀서 주변에서 다 반대하는데 밀어붙인 것도 있었고. 촬영할 때는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작품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고민의 깊이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즈음에 <살인자의 기억법>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어려운 캐릭터라서 좋았다. 이 영화는 고민하고 싶지 않아도 고민이 되겠다 싶어 선택했다.

-무엇이 가장 크게 바뀐 것 같나.

=절실함?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 변성현 감독을 만났을 때 한 이야기가 있다. 어차피 나는 배우로서 내려오는 길이긴 한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싶진 않다. 한 계단 한 계단 잘 내려오고 싶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습관처럼 몸에 익은 대로 흘러가지 않고 한발씩 꾹꾹 눌러 찍는 작품들을 해보고자 했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 50대 들어서면서 고른 영화가 그런 작품들이다. <불한당>은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고 <살인자의 기억법>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50대 시작으로 나쁘진 않다고 보고 있다. 나에게 자극을 준 작품들이고 지금도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타워>(2012) 때 가진 인터뷰를 보면 작품을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이 사람이라고 했다.

=그건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감독의 캐릭터에 따라 영화가 나오기 마련이니까. 다만 지금은 사람을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다. 변성현 감독은 거의 신인감독이었는데 사실 몇번 보고 상대를 알긴 어렵다. 미팅 때 ‘나는 당신 못 믿는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했다. 의심하자. (웃음)

-주로 수더분하고 서민적인 캐릭터를 맡아왔는데 <불한당>에서 그야말로 연기 변신을 했다.

=<감시자들>(2013) 때는 감독이 스타일리시했지 내가 멋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불한당> 때는 감독이 부탁을 했다. 나를 빳빳하게 펴는 게 목적이라고. 그렇게 몇 차례 촬영하고 나니 내가 은근히 폼을 잡고 있더라. 배우가 일부러 폼을 잡을 필요가 없다고, 배우라고 일상에서까지 폼을 잡으면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웃음) <불한당>은 굳이 안 잡을 필요도 없다는 걸 배운 영화다. 그전까지는 구겨져서 일상을 연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가두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촬영장에서 멋 부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고 신기했다. 설경구라는 배우를 멋지게 펴고 싶다고, 그러니 제발 참아달라고 했던 변성현 감독에게 고맙다. 감독, 촬영, 키 스탭까지 대부분 신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한편으론 불안했지만 날것의 느낌이 있어 좋았다. 각자 고집도 어마어마하다. (웃음) 원래 콘티를 안 보는 편인데 하도 불안해서 콘티를 보여달라고 했고 그걸 보고 완전 반했다. 그거 자체로 영화였다. ‘한컷을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친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부끄러웠다. 젊은 에너지와 열정에 자극을 많이 받고 스스로의 빗장도 조금 느슨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빳빳하게 편다’는 표현을 빌리면 <살인자의 기억법>의 병수는 완전히 구겨진 캐릭터다.

=고민을 엄청 많이 했는데 무슨 고민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영화다. 살이 빠진 상태를 유지해야 하니까 새벽 4시 정도엔 일어났는데 매일 다음날 찍을 장면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매번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기분이랄까. 다행인 건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 감독, 촬영, 키 스탭들이 모두 베테랑이었다는 거다. 내 고민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 거기서 오는 안정감이 있었다. 현장 가면 원신연 감독에게 어떻게 할지 묻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명확하지 않아도 감독이 분명한 비전이 있다면 나는 그때 찍는 장면에만 몰두하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은 읽어봤나? 영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원작을 끝까지 안 보려고 했는데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참지 못하고 봤다. 소설 그대로의 병수를 표현하라고 하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 같다.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하지만 영상으로 나왔을 때의 느낌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시나리오상의 병수에게 숨을 좀더 불어넣었다고 할까. 결국 이해하기 쉽게, 친절하게, 좀더 정직하게 가자는게 결론이었다. 치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료를 본 적이 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가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는 장면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물건을 사오다가 길가에서 머뭇거리는 거다. 그러다가 내뱉는 말이 ‘야단났네, 집을 어떻게 가지’였다. 원래 기억이 끊어지는 건 그렇게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거지만 영화에서는 무언가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사실적인 표현에 더 매달렸겠지만 지금은 영화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기억을 잃는다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신호를 만들어야 했고 그게 얼굴 근육에 경련을 만드는 거였다.

-병수가 스스로 유머에는 반응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영화 전반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 중 하나가 유머다.

=병수가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젊은 연쇄살인자가 나타나자 근육 단련을 하지 않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악력으로 사과를 부수려고 하는 무모한 도전도 하고. 전체적으로는 소설의 습한 느낌을 가져오되 좀더 구체적이고 덜 어둡게 그리고 싶었다. 나는, 그리고 병수는 심각하지만 웃음이 유발되는 상황들이 그런 예시일 거다. 강철중 때도 그랬다. 본인은 심각한데 그럴수록 유머가 발생하는. 그런 상황들을 깔아주는 게 연출의 힘인 것 같다.

-굳이 시기를 나눠보자면 세개로 구분된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이창동 감독님과 함께했던 초반, <공공의 적> 강철중이라는 서민의 페이소스를 담은 대중상업 캐릭터로서의 중반, 그리고 <살인자의 기억법>과 <불한당>으로 새로운 행보를 내딛고 있는 지금이다.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걸 반복하다 보니 나도 피곤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한동안 수많은 강철중들의 변주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자기 복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게 위기감의 시작이었을 거다. <불한당> 개봉 후에 이창동 감독님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런 말씀 잘 안 하시는데 잘 봤다고 하시면서 한 말씀 덧붙이시더라. “너도 좀 변해야 돼, 이제.” 예전에는 변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하셨던 분이. (웃음) 그렇다고 사람이 그렇게 크게 바뀌겠나. 다만 생각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스스로에게 고지식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껍질이 부서지듯 깨지고 있는 기분이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병수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인 것 같다. 사실 첫 장면에서 병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부터 압도당하면서 시작한다. ‘아 그래, 설경구가 이런 메소드 배우였지’ 하고 기억이 상기된다고 해야 할까. 정반대로 엄청나게 살 찌웠던 <역도산>(2004)이 생각나기도 했고.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다. 보는 이들이 첫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줄까 고민이었다. 가령 <역도산> 때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있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했다. 일단 레슬링 선수 같아야 하고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역도산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을 덜했던 것 같지만 당시 포인트는 몸, 그리고 말이었다. 외형적인 요소는 지금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몇몇 영화들은 첫 등장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관객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첫 장면에서 적어도 30, 40%는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병수는 엉뚱하기도 하고 냉정하면서도 습한 느낌이 있다. 일반적이기도 하고 전혀 일반인 같지도 않고. 이거다 하는 명확함이 없어서 매일 숙제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촬영에 임했다. 기억이 날아가는 중이라 일부러 ‘이거다’를 선명하게 잡지 않았던 것도 있다. 확신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얼굴로 설득될 수 있는 무언가.

-흰 운동화, 김밥, 대나무 숲 같은 소품들처럼 인물 주변의 장치들이 캐릭터를 선명하게 설명해준다.

=맞다. 예전에는 캐릭터를 온전히 내가 만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드는 게 캐릭터의 한 부분이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살인자의 기억법>부터다. 스탭들이 화면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이제야 한다. 조금 더 편해지고, 재밌어지고, 깨지고 있는 중이다. 현재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촬영을 마쳤고, 이수진 감독의 <우상> 촬영을 앞두고 있다. 한석규 배우와 함께한다는게 긴장되고 설렌다. 독하게 뛰어들어 뒹굴어야지. 감독님이 외로워야 한다고 앞으로 넉달 동안은 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 (웃음)

-설경구 연기 인생의 세 번째 막이 올랐다고 한다면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만나고 싶나.

=사람만 보고 고르진 않을 거다. (웃음) 요즘엔 주어진 캐릭터의 얼굴에 관심이 간다. 예전에는 외형적인 부분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였는데, 최근엔 이 캐릭터가 어떤 삶을 살아서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 김병수는 어떤 얼굴일까 나도 궁금해졌다. 영화란 결국 스탭들과 함께 얼굴 하나를 만드는 작업 같다. 그래서 요즘엔 독하고 강한 캐릭터에 손이 더 가는 것 같기도 하다. 흥미로운 얼굴들을 발견해나가는 게 너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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