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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삶이 영화와 맞닿으면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주현 사진 오계옥 2017-09-21

<시인의 사랑>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시인 택기(양익준), 그런 철없는 남편을 부양하며 적극적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아내(전혜진), 무욕의 택기에게 특별한 감정을 안겨주는 소년(정가람)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희극과 비극을 능란하게 오가는 이 작품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며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김양희 감독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삶의 일면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무엇보다 서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영화 고유의 분위기를 지켜낸 점이 인상적이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김양희 감독을 서울에서 만났다. 데뷔작 <시인의 사랑>은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6년 전 생활 터전을 제주도로 옮겼다. 오늘도 제주에서 올라왔다고.

=제주 생활 6년차다. 사는 곳은 애월이고 서귀포에서 헌책방을 하고 있다. 원래는 작업실로 쓰던 사무실인데 작업이 뜸해지면서 책방으로 꾸몄다. 3개월 전에 책방 문을 열었는데 하루에 손님이 한명도 안 올 때가 많다. (웃음)

-영화의 주인공인 현택기의 실제 모델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활동하고 있는 현택훈 시인이다. 현택훈 시인의 어떤 면이 영화적으로 다가왔나.

=일단 사람 자체가 너무 선하다. 덩치는 큰데 마음은 여리고 또 섬세하다. 시인인 아내와 자학 개그도 즐기고. 뭔가 언밸런스한 매력이 있었고 그 모습이 귀여웠다. 참고로 아내 되는 김신숙 시인은 영화에 나오는 억척스런 아내 캐릭터와는 다르다.

-얘기한 것처럼 택기와 아내는 상반된 캐릭터다. 시인은 아름답고 비극적인 시의 세계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아내는 생활력 강한 현실적 존재다. 소년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소년의 아버지는 10년째 병으로 누워 있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억척스레 장사해서 자식을 키웠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성의 역학관계가 재밌었다.

=4·3 사건 같은 비극을 통과하면서 제주에는 남자들이 귀한 존재가 됐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제주의 해녀들을 보면 아침엔 물질하고 점심엔 밭일하고 저녁엔 집안일을 한다. 반면 할아버지들은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노인정에서 장기를 둔다. (웃음) 그런 모습이 제주에선 자연스럽다. 영화에서도 택기는 이상을 좇을 뿐 현실의 기반은 없는 사람이다. 반대로 아내는 내 가족, 우리의 삶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택기가 빨리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가정이 있는 시인이 어느 날 소년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커다란 비극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데 영화는 어둡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희극과 비극을 유연하게 오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시나리오를 쓸 때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신인감독이니 보여줄 건 시나리오밖에 없고, 그러니 재밌게 잘 읽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톤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중요했고, 결과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톤이 더 밝아지긴 했다. 우리의 삶이 슬프기만 하거나 재밌기만 하진 않잖나. 모든 일에는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영화도 그런 걸 선호한다. 마냥 진지하기만 한 건 성정에 안 맞는 것 같다.

-택기의 감정이 조금만 진지해지려 하면 적나라한 현실이 그 진지함을 침범한다. “인생은 코미디야. 슬픔이 문밖에 서 있다가 도망을 갔어”라는 택기의 독백처럼 영화 기저에 그런 톤이 깔려 있다.

=극적인 순간이라 하더라도 힘들고 슬픈 감정에 너무 몰입하면 리얼리티가 깨지는 것 같다. 더 웃기려고 슬랩스틱을 하는 순간에도 리얼리티가 깨지고. ‘여기까지는 리얼하게 느낄 거야, 여기까지는 감정이입할 수 있을 거야’, 그런 기준이 적용된 것 같다. ‘슬픔을 마트에서 파는 거면 사오고 싶다’고 생각하는 택기가 내게는 철없이 보였다. “인생은 코미디야. 슬픔이 문밖에 서 있다가 도망을 갔어”라는 독백 장면의 믹싱을 할 때 일부러 개소리 같은 것도 넣었다. 정직하게 노동하는 것, 먹고살기 위해 노동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택기 넌 지금 무슨 개소리야, 그런 마음으로. (웃음)

-택기와 소년의 관계 묘사에선 사랑하는 마음을 부각할 뿐 육체적 관계를 보여주진 않는다.

=처음엔 키스 신도 있었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싶어 쭉 시나리오를 써봤는데, 육체적 사랑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영화의 전체 톤이나 리얼리티에 부합하지 않고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아서 표현을 완화했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고, 둘의 관계를 동성애에 국한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애정을 가진 대상이 잘됐으면 좋겠고, 그 사람을 보호해주고 싶고,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고, 그런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시적으로도 성장하고 세상에 대한 사랑도 갖게 된다. 사랑이란 것의 성격이나 범위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사용한 시들은 평소 좋아하던 시였나.

=현택훈 시인의 시는 그 인물을 캐릭터화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들어왔다. 김소연 시인의 시는 원래 좋아했고. 이야기 전개상 <그래서>만큼 좋은 시도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쓰이는 기형도의 <희망>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찾았다. 정교한 다섯줄의 문장으로 시인의 지난 과정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했다.

-제주에서 오래 산 사람만이 담을 수 있는 제주의 기운을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제주에서 단편영화 <보청기>(2013)를 찍었다. 그 단편을 보고 제주영화제 프로그래머가 ‘4·3을 경유하지 않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제주의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제주의 슬픈 역사를 담지하고 있지만 나는 이주민이기에 제주가 내 생활공간이고 영감의 공간이다. 역사의식에 짓눌리지 않고 제주를 낯설지만 익숙한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6년 전 영화를 포기할 마음으로 제주도에 간 건가.

=열패감이 컸던 것 같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특정한 장르영화에 포섭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어떻게 영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람들의 관계와 그 속의 다양한 감정들이다. 그래서 일단 내가 먼저 살아본 다음에 그 경험을 재료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용기를 내 제주도로 향했다. 삶이 영화랑 맞닿으면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숙해지면 그만큼 더 성숙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 테고.

-두 번째 영화로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

=아직 잘 모르겠다. <시인의 사랑>에서 전혜진 배우가 연기한 아내 캐릭터처럼,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고 인정 많고 모든 걸 다 보듬어주는 여자 이야기를 해보고 싶긴 하다. 제주도에서 그런 여성들을 많이 봤다. 낮에는 감귤밭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저녁엔 술도 열심히 마시고 그러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는 여성들이 제주도에 많은데 그런 인물을 영화에 데려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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