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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훈의 <머니볼> 달리기를 사랑하는 방식
조현훈(영화감독) 2017-09-26

감독 베넷 밀러 / 출연 브래드 피트, 조나 힐,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 제작연도 2011년

나는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달리기에 몰두했다. 망원 유수지에서 출발해서 한강공원으로 진입한 뒤 마포대교를 돌아 나오는 달리기, 거창하게 말하자면 단거리 마라톤이었다.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는 매일 달렸으니 주 단위로는 50km, 한달을 기준으로 하면 어림잡아 200km 정도가 된다. 적어놓고 보면 꽤 뿌듯한 수치이지만 사실 이 정도는 준아마추어에도 못 미치는 훈련량이다. 그럼에도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탓인지 달리는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나는 항상 무릎 통증과 족저근막염으로 괴로워했고, 갑작스런 소나기라도 맞는 날에는 영락없이 감기, 몸살에 걸려 며칠을 앓아 눕곤 했다. 허벅지나 종아리가 딱딱하게 굳어서 일상생활조차 불편하던 중에도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10km 남짓 되는 거리를 달리던 나날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때때로 기분이 상쾌하다거나 몸이 가볍다거나 하는 착각이 들다가도 매번 목표 거리의 절반을 지날 즈음에는 혀를 빼고 헐떡거리며 집을 나선 것을 후회했다. 그러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 고통스러운 짓을 왜 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끈기 있게 달리다보면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달리다보면 나를 둘러싼 공포나 부조리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명료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그건 여러모로 막연한 욕심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얻은 것은 앞서 말한 약간의 다리 부상과 조금 늘어난 폐활량뿐이다. 천성을 바꾸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달리기가 손쉬운 변화를 줄 것이라 요행을 바란 스스로의 안일함이 새삼 놀랍다. 하지만 달리기가 남긴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린 희미한 예감 한 가지. 달리기가 내게 남길 유일한 것은 계속해서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것.

<머니볼>은 최근 몇년간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하나다. 자꾸만 반복해서 보게 된 데에는 아마도 빌리 빈(브래드 피트)이라는 인물의 힘이 큰 것 같다. 내게 빌리 빈 단장은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는 인물이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일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 언제나 혼자 있거나 기껏 해야 한둘의 인물과 골방에 앉아 있다. 그와 대립하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팀 감독이 승리의 성과를 훔쳐가도록 언론이 부추겨도, 팀이 20연승이라는 유례없는 대기록을 세워도 그는 좁은 사무실과 운동실에서 상황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대단한 성과가 기쁘지 않냐며 묻는 참모 피터 브랜드(조나 힐)에게 그는 평판과 기록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빌리 빈은 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걸까.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머니볼>의 엔딩, 빌리 빈의 퇴장은 이렇다.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주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안받고 거취를 고민 중인 그는 차를 타고 가다가 딸에게 받았던 녹음 CD 한장을 재생한다. 딸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가수 렌카의 <The Show>를 노래한다.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려고 애쓰는 건 너무 힘들어’란 가사가 빌리 빈의 초췌한 눈가에 깃든다. 곧이어 그가 거액의 연봉을 거절하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남았다는 사실, 여전히 리그 마지막 게임의 우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막으로 뜬다. 나는 이 순간, 언제나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때로는 내가 빌리 빈의 선택에 약간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영화가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단순한 문장이 내겐 위로가 된다. ‘그냥 쇼를 즐겨요.’

짧았던 여름이 가고 선선한 계절이 돌아오자 나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만약 달리기가 남기는 것이 달렸다는 행위 그 자체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다면, 이번에는 부상을 줄이고 싶다. 기록 달성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고 싶은 열망을 앞으로도 계속 잃지 않고 싶다. 그게 내가 달리기를 사랑하는 방식, 내가 무언가를 사랑하고 지키는 방식이 되었으면 한다.

조현훈 영화감독. 장편 데뷔작 <꿈의 제인>(2016)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CGV아트하우스상을 수상했고, 두 주연배우 구교환이민지 모두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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