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주성철 편집장] 분복(分福),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고
주성철 2017-10-06

“이젠 제목도 잊어버렸지만, 유대인 학살을 그린 어느 극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었다.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떤 남자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행위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자 유대인이 이런 말로 그 변명을 내친다.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죄가 무겁다.’ 그 장면을 최근 계속해서 떠올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의 ‘책임’이라는 챕터에서 그는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를 그의 도쿄 사무실에서 만날 일이 있어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사람을 속이려는 정부에 대해서, 옳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계속 발언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추석이 되기 전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바쁜 추석 합본호 일정으로 후배들이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다녀온 터라 각종 선물로 입막음을 했다. 가마쿠라와 에노시마 등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촬영지를 둘러보고 도쿄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 인터뷰했다. <씨네21>에 ‘허지웅의 경사기도권’을 연재 중인 허지웅 평론가와 함께 영화 속 에노시마의 우미네코 식당, 네 자매가 헐레벌떡 출근하던 고쿠라쿠지역, 첫째 사치(아야세 하루카)와 막내 스즈(히로세 스즈)가 속마음을 털어놓던 기누하리야마 정상, 그리고 네 자매가 마지막에 이르러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던 시치리가하마 해안 등을 일정이 빠듯한 관계로 걷는 듯 빠르게 둘러봤다. 자세한 기행문과 인터뷰, 그리고 정말로 ‘태풍이 지나가고’ 맑게 갠 멋진 사진들(실제로 출국 전날까지 일본에 태풍이 몰아쳐 여행이 무산될 뻔했다)은 다음 1126호에 실릴 예정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흔쾌히 도쿄 시부야에 있는 자신의 영화사로 우리를 초청했다. 아담하고 고즈넉한 그 사무실 입구에는 크고 거창한 간판이 아니라, 아주 조그맣게 프린트된 종이로 ‘분복’(分福)이라는 회사명이 붙어 있었다. ‘복을 나눈다’는 뜻으로, 그가 주축이 되어 기획 단계부터 마음이 맞는 감독들과 진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며 함께하기 위해 설립한 영화사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아주 긴 변명>(2016)이 바로 분복에서 제작된 영화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는 ‘분복’이라는 이름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다, 그렇게 사람들과 복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의 영화 <세 번째 살인>이 공개되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나자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몇달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김지석 전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의 장례식 때 혼자 부산을 찾기도 했다. 다른 한국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긴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도 했던 그는 (서병수 부산시장은 그 옆을 ‘노 룩 패스’ 하듯 새치기하여 지나갔었다) 올해 김지석을 기리는 ‘지석상’이 신설됐다는 소식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올해 영화제 때 그를 위한 행사가 분명 있을 거란 생각에 출품과 무관하게 꼭 부산을 찾을 계획이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22번째 개막식이 이제 막 열리려 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