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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베를린아시아영화제가 선택한 영화들
글·사진 한주연(베를린 통신원) 2017-10-25

아시아 이주민과 여성들의 현실재를 포착하다

베를린아시아영화제가 열린 발하우스 전경.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때이른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을 쓴 시네필들이 길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지난 10월 7일 저녁, 어두컴컴한 골목길의 반짝이는 꼬마전구 장식이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렸다. 베를린 다문화 본거지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유서 깊은 극장 발하우스에서 제5회 베를린아시아영화제가 포문을 열었다. 허름한 입구를 지나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확 트인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1863년에 지어진 시 소속 연극 공연 공간 발하우스는 주로 이주민을 주제로 한 연극 공연이 열리는 장소다. 이곳에서 10월 14일까지 8일간의 영화축제가 열렸다.

벌써 10년째다. 베를린아시아영화제의 시작은 북한과 한국 고전영화를 스크린에 소개하고 한국, 대만, 홍콩 여성감독의 작품을 소개하는 여성영화제였다. 2회부터는 아시아영화제로 확장됐다. 2년마다 열리는 아시아영화제는 해를 거듭하며 베트남, 타이, 중국, 몽골, 필리핀, 캄보디아, 일본 디아스포라까지 아우르며 진화했다.

<국>

바쁜 이주노동자의 삶을 그린 영화들

베를린아시아영화제는 지속적으로 ‘아시아 디아스포라’를 테마로 한 영화들에 관심을 보여왔다. 올해 영화제에서도 다양한 이주 사연을 안고, 문화와 인종이 다른 곳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속사정이 8 일간 스크린에 펼쳐졌다. 올해 영화제의 타이틀은 ‘비지 보디스’(Busy Bodies). 자본주의사회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사는 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국에 가족을 두고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유럽이나 미국에 사는 아시아 2세들의 삶과 정체성 고민, 성소수자로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아픔과 속 깊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이 관객과 만났다. 최선주 베를린아시아영화 제 집행위원장은 “오늘날엔 누구나 바쁘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 부유층이 해외여행이나 잦은 이동 때문에 힘들다면, 노동 이주민과 피난민의 행동반경은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정한 경로로 흐르고, 부유한 사회의 자본이 그 경로를 결정한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이런 흐름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영화제는 모두 ‘로컬 보디스’(Local Bodies), ‘모바일 보디스’(Mobile Bodies), ‘퀴어 보디스’(Queer Bodies) 등 총 3개 섹션으로 나뉘어 극영화,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30여편을 선보인다. 그중 한국계 감독과 한국감독의 작품은 모두 7편이다. 퀴어 섹션에 이영 감독의 <불온한 당신>, 모바일 섹션에 탈북여성의 삶을 기록한 윤재호 감독의 <마담 B>가 포함되어 있다. <불온한 당신>은 성적 지향을 달리하는 이들을 종북으로 낙인찍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레즈비언 감독의 시각으로 반추해보는 다큐멘터리영화다. 또한 <마담B>는 강인한 탈북여성이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한국도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걸 깨달아가는 내용을 담는다.

개막작 <>(Gook)은 아시아 한국계 미국 배우 출신의 감독 저스틴 전이 제작, 감독을 하고 주연을 맡았다. 1992년 LA 폭동을 배경으로 한 <>은 올해 선댄스영화제 넥스트 부문에 진출해 관객상을 수상했다. 흑인 커뮤니티와 한인 커뮤니티의 갈등 기저엔 인종 비하 시스템이 깔려 있다. ‘국’이란 말도 미국에서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은어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LA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는 한인 형제와 어린 흑인 소녀가 우연한 사건을 통해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인종간 편견과 적대적 분위기 속에 이들 사이의 우정은 빛난다. 이들이 인종 갈등에 휘말려 벌어지는 사건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스파 나이트>

세계 속 아시아 여성들의 목소리

이번 영화제에서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을 시원하게 깨뜨리는 영화들이 돋보였다. <그렇게 날 보지마>(Don’t Look at Me That Way, 2015)는 몽골계 독일 여성감독 위센마 보르추의 데뷔작이자 유수 영화제들에서 수상한 화제작이다. 감독은 직접 주인공 헤디 역을 맡아, 격식을 깨는 과감한 러브 신을 보여준다. 검고 긴 생머리의 젊은 동양 여성이 금발의 아이를 데리고 몽골 전통 천막에 사는 할머니 집으로 가는 장면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과연 이 여인이 이 아이의 엄마일까? 어떤 사연으로 아이는 동양 여자와 함께 있는 걸까. 이 동양 여성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젊은 금발의 여성 이파와도 친해지게 된다. 영화는 러닝타임 88분 내내 항상 관객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특히 주인공 헤디의 거침없고 당당한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영국 사회 내 중국 커뮤니티를 그린 영국식 코미디 <핑퐁>(PingPong, 1987)의 여성캐릭터도 당당한 전문직 여성의 면모를 보여준다. 런던에서 큰 중국 식당을 운영하는 갑부가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숨져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범죄극은 결국 아무도 범인이 아니었던 소동극으로 끝난다. 중국계 영국인 엘레인은 변호사다. 망자의 유산 상속 문제를 다루며 가족 문제를 천착하다 상속자인 아들과 사랑에 빠지고, 가족간 갈등의 중재자가 된다.

<윈도 말>(Window Horses, 2016)은 중국계 캐나다 감독 앤 매리 플래밍의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로지는 중국 출신 조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 캐나다 여성이다. 로지는 시를 쓰며 예술가를 꿈꾼다. 로지는 이란에서 열리는 국제 시 페스티벌에 지원하고, 결국 당선 후 초대받는다. 거기서 세계 각국 시인들과 만나 교류하며 성장하고, 이란 출신 아버지가 사라지게 된 비밀과 대면한다. 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영상 속 그림이 일품이다. 중국계 캐나다인 어머니와 이란 출신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는 문화와 인종이 다른 이들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마치 시와 같다. 그들의 사랑의 결과인 로지가 시인이 되니 말이다.

<머니 허니>(Money Honey, 2015)는 필리핀 이주노동자 여성들의 고단하고, 즐겁고, 슬픈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자스민 리 칭휘 감독은 대만에 노인 간병인으로 이주노동을 온 여성들의 17년간의 삶을 카메라로 담았다. 1998년 30대 중·후반이었던 이들은 이제 50대의 중년 여성이 되었다. 이들은 고되지만 성심성의껏 돌보며 즐겁게 일하나,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편치 못한 마음으로 산다. 아이들의 교육과 생활비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고된 노동으로 필요한 돈은 벌지만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장례식도 못 가는 등 많은 것을 잃고 산다. 이들이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도 정들었던 노인들과 헤어질 때 눈물을 쏟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윈도 말>

극우가 확장되는 현실에서

‘로컬 보디스’ 부문의 단편영화들은 유럽에 사는 젊은 아시아계의 다양한 고민을 보여준다. 부모 세대와의 갈등, 유럽에 거주하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유럽 문화와 부모 세대와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다뤘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중국인 2세, 독일에 사는 한국 동포 2세의 삶도 녹록지 않다. 독일 동포 2세 정승현 감독의 단편영화 <일어나>는 권투를 하는 26살 태식이 주인공이다. 간호사로 일하는 어머니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그는 부모의 요구에 맞춰 살기도 힘들고, 독일인에게도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가 그런 내면적 갈등을 권투로 해소하며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2016년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스파 나이트>(Spa Night, 2015)는 한국계 미국인 게이로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슬픔을 보여준다. 데이비드는 LA의 한국식 목욕탕에서 일한다. 그의 가족은 열심히 일하지만 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좋은 대학에 가기 원하는 부모의 압박과 기대,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마음, 또 게이로서 겪는 성정체성의 고뇌가 그대로 전달된다.

제5회 베를린아시아영화제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고 했던 2011년 아시아영화제에서 진일보했다. 규모와 주제가 풍부해졌으며, 아시아 각국 감독들이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한발씩 다가갔다. 영화제를 찾은 관객은 스크린에 펼쳐진 아시아 디아스포라 삶에 어떤 마음을 가질까. 이 영화제가 극우의 물결이 일렁이는 유럽에서 평화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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