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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 감독, "정일우 신부님이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면 참 좋겠다"
사진 오계옥김소희(영화평론가) 2017-10-26

‘돌아가신 신부의 행적을 기리는 추모 다큐멘터리’라는 설명은 <내 친구 정일우>를 포괄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 이 영화는 추모의 형식이 아닌 김동원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한가운데 놓아 보아야 한다. 늘 대상과의 스킨십을 중시해온 감독은 그것이 불가능해진 상황 앞에서 4명의 화자와 기억을 더듬는 방식을 취한다. 나의 기억을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비교, 대조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동 기억 쓰기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정일우 신부에 관한 완성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끊임없이 쓰이는 다큐멘터리다. 매체 인터뷰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개봉을 결정했던 감독은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계약 위반임을 강조했다. 더군다나 5개월 예정의 남미 여행을 앞둬 마추픽추와 티티카카를 그리는 감독에게 신촌의 한 카페 안은 너무도 좁아 보였으리라. 인터뷰 내내 “신부님이 도와준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던 김동원 감독은 정일우 신부를 생각하다가 잠시 촉촉해진 눈가를 슬쩍 닦기도 했다.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그냥 눈이 침침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정일우 신부에 관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건 언제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상계동 올림픽>(1988)을 찍을 때부터 ‘이 사람에 관한 다큐를 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악착같이 빼고 찍었다. (웃음) 미사 장면 빼고는 센터에 있는 컷이 정말 없더라. 신부님이 돌아가실 즈음 짧은 추모 영상을 생각하던 와중에 돌아가셨다. 신부님의 행적을 모은 기념품 같은 단편을 몇 사람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찾다보니 생각지 못한 엉뚱한 자료들이 너무 많더라. 특히 평화방송의 도움을 많이 얻었다. 인터뷰랑 몇컷 빼고 괴산에서 찍은 것은 전부 평화방송 거다. 20년 전 촬영 원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본 방송에서 안 나갔던 음주 장면, 돼지 잡는 장면 등 NG컷을 잘 썼다. 그런 걸 발견하는 순간 좀더 길게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4명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구조다.

=전에 <한 사람>(2001)이란 작품을 만든 적 있다. 2000년에 돌아가셨던, 한국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서로 베르토 신부에 관한 휴먼 다큐인데, 만드는 형식을 고민하면 그 방법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 만드는 사람의 프라이드로 다른 형식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일 가까웠던 사람들을 시기별로 정해서 지금 생각나는 것이나 관련된 에피소드를 편지로 써달라고 했다. 그거랑 찾은 자료들과 연결이 되나 안 되나 보면서 수정해간 거다.

-<한 사람>이 스틸 이미지로 주로 구성된다면, <내 친구 정일우>는 동영상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서로베르토 신부가 워낙 괴팍해서 사진 찍는 것을 되게 싫어했다. 몇개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알코올 중독이 쉽게 낫는 게 아니라고 그러더라. 조금 전까지 멀쩡하다가 팍 화를 내고 자기 조절이 완전히 안 됐기 때문에 거의 촬영을 못했다. 그래도 서 신부는 워낙 갈등이 많은데, 정일우 신부의 경우 싫다는 사람이 없었다. 과연 스토리가 될까 걱정을 많이 했다. 잘못하면 재미가 없거나 느끼하겠다는 생각을 해서, 너무 훌륭하지만은 않은 다른 속성들을 보여주려 했다. 반대로 <한 사람>은 서 신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걸 추려내는 데 애를 먹었다. (좌중 웃음) 정 신부님도 예수회 안에서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박홍 신부를 인터뷰하려고 했는데 이분도 편찮으셨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한테 인터뷰하기는 좀 그렇잖나. 그래서 못했지.

-감독님이 내레이션을 담당한 상계동 부분은 정일우 신부에게 쓴 편지인 동시에 왜 <상계동 올림픽> 속편을 만드는 것이 버거웠는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슬쩍 끼워넣었지. (웃음) 사실 편지 형식이라고는 해도 신부님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보여주는 편지니까 약간의 설명적인 것도 할 수 없이 끼어들게 된다. 괴산을 어떻게 내려갔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상계동을 말할 필요가 있었다. <상계동 올림픽> 속편은 20년 넘게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끝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 ‘그때 느낀 공동체가 희미해졌지만 1년에 한두번 정도는 만났다’로 마무리하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조차 안 하더라. 세상 이야기로 끝맺어야 하나, 내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신부님을 중심에 놓고 보니까 이야기가 되더라.

-공동 작업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직접 촬영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던가.

=편하지 뭐. 이젠 눈이 잘 안 보인다. (좌중 웃음) 조연출 없었으면 못할 뻔했어. 촬영뿐 아니라 나같이 엉덩이 무거운 사람을 다그치는 게 쉽지 않다. 노은지 조연출이 내 제자인데, 그걸 잘한다. (웃음) 그래서 겨우 했다. 원래 1년 정도는 빨리 나올 수 있었는데 학교가 내 핑계였다. 나는 원래 규칙적으로 안 하고, 1박2일이고 3박4일이고 밤을 새우는데, 내일 학교 가야 한다 하면 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

-이례적으로 재연 장면이 등장하는 인터뷰가 있다.

=인터뷰가 엄청 길었다. 인터뷰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그걸 다 쓸 수가 없다. 1분 반 정도로 줄이니 자른 자국이 엄청 많았다. 그걸 가려야 하기도 했고, 뭔가 그림이 연상되니까. 영화에 나온 건 느티나무인가 그렇다. 이야기한 장소에 가보니 소나무가 벼락 맞아서 죽었대나 어쨌대나 없어졌더라. 길 안내하던 친구가 속리산 들어가면 있긴 한데 멀대. 그래서 ‘너무 멀다, 가까이서 찍자’ 했다. (웃음) 나무보다 중요한 게 헤드라이트였으니까.

-처음에 전형적인 방식으로 삽입된 것처럼 들렸던 음악이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이다. 그 자각의 간극이 흥미로웠다.

=참 운이 좋았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끝에 등장해야 한다는 건 비교적 편집 초반에 결정했다. 그 끝을 위해서는 복선을 깔고 싶었다. 그런데 그 노래가 그렇게 정서적일 줄은 몰랐다. 김일안 음악감독에게 느리게 쳐보라고 했더니 딱이야. 중간에 나오는 음악도 ‘했던 것 중에 골라줘봐’ 했더니 다 맞았다. 게다가 2분 몇초로 해달라는 얘기도 안 했는데 시간까지 딱 맞았다. ‘신기하다. 신부님이 도와주는구나’ 했다.

-정일우 신부의 어떤 점을 관객에게 알리고 싶었나.

=나는 정일우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게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일우 신부님 때문에 걱정이 많이 없어졌다. 정일우 신부님의 자유스러움은 그냥 낮은 데를 선택하는 데서 온다. 그 낮은 데라는 게 완전히 밑바닥은 아니고 나보다 조금 낮은 곳이다. 물론 조금씩 낮은 데를 찾다보면 점점 밑바닥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실은 요새 사람들이 정일우 신부님을 조금 좋아할 것 같더라. 제목을 ‘내 친구 정일우’라고 지었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일우 신부님도 좋아할 거고, 관객도 그 사람을 친구로 받아들이면 자유스러워지지 않을까.

-정일우 신부가 교수직을 내려놓았다는 대목에서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을 내려놓은 감독님의 선택이 겹쳐졌다.

=(손사래 치며) 아이, 나는 거의 정년퇴임이지. (좌중 웃음) 내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만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약간은 그런 기분이 있었다. ‘정일우 신부가 그랬으니까, 나도 때려치워야 된다’는 절대로 아니고. ‘정일우 신부도 때려치웠는데 나도 때려치울까. 그것도 괜찮겠다’ 그 정도였다.

-감독님 삶의 선택에 있어서 정일우 신부가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나.

=그렇다. ‘정일우과’가 됐다. 벗어나기 힘들걸. 상계동 주민들도 그렇지만 정일우 신부님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정일우 신부님 때문에 팔자 바뀐 사람이 굉장히 많다. 거기 나온 사람 거의 다 그래. 신앙에서 가난은 당위고 의무고 그렇잖나. 그런데 심지어 좋아 보이더라. ‘힘들여서 해야 한다’가 아니라 즐기게 되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가난의 정도가 궁금하다.

=첫 단계는 잘 살려고 아등바등대지 않는 것. 나눴을 때의 기쁨을 아는 거기에 어떤 신비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정말 맞다. 오히려 놔버리면 편해진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가진 자에 속해 있다. 정도의 문제는 있지만,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버릴 게 있고, 나눌 게 있으니까. 더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이 삐죽삐죽하는 와중에 몇 사람이 내 것을 잘라서 밑으로 깔아주면 편차가 조금 줄어든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 같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거기에서 치료가 되는 것 같더라.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일우 신부님처럼 같이 있는 것, 못 주더라도 같이 있으면 화학적인 변화가 오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인간다운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게 됐다. 나름대로 인간다움에 관해 정의한다면.

=정일우 신부님도 못한 것을 내가 어떻게 해. (웃음) 신부님도 세상의 한점이고 나도 한점이다. 신이나 큰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갖느냐 안 갖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각자에게 주어진 미션이랄까 그것만 잘하면 될 것 같다. 사실 키워드는 희망이다. 끝끝내 놓지 않는 것. 더럽고 어둡고 속상하고 배신당하고 그래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 정일우 신부님이 그랬다. 내가 좋은 뜻으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도둑놈 취급하면 넌더리치고 도망갈 텐데 다시 가잖나. 그건 쉽지 않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정일우 신부가 이 작품을 보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러게. (어떻게 반응할지가) 좀 그려진다. (말투를 흉내내며) “재밌어요. 재밌어요” 그러면서 막 깔깔대고 웃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 광고는 좋아하진 않았을 거다. 정일우 신부님은 종교와 속세의 경계를 제일 싫어했거든. 성당 나간다니까 지금도 잘 사는데 왜 나가냐고 그러던 분이니까. 이 영화를 종교영화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셨겠지.

-다큐멘터리 안팎으로 공동체를 겪어오면서 느끼신 변화가 궁금하다.

=대학 때 연극을 하면서부터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상계동에서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시 그 생각이 나더라. 그런데 완전한 공동체로 갈수록 따져야 하는 게 많다. 상계동 때 복음자리 공동체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기가 번 것을 다 같이 내놓고, 내가 얼마를 가져가면 달아놓고 그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때는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철거투쟁이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공동체로 나아가는 정치투쟁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의 답을 찾을 기회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상계동이 깨지고, 나도 결혼하면서 가난한 공동체는 점점 힘들게 느껴지더라. ‘푸른영상’도 제작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품앗이하듯 네 카메라 내 카메라, 네 데크 내 데크, 누군가가 작업할 때 서로 아르바이트를 해주면서 돕고 그랬는데, 아르바이트는 하기 싫고 내 작품인데 남이 너무 간섭하면 싫고 다른 사람 가편집 시사할 때 잘 보지도 않고 하면서 점점 공동체가 느슨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공동체가 이래야 한다는 법은 없거든. 수준에 맞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산다, 사람들은. 그런데 옛날처럼 끈끈한 게 대접을 못 받는 것 같다. 뭔가 부담이 생기는 거다. ‘왜 공동체가 엷어졌을까.’ 그게 <상계동 올림픽> 속편을 준비할 때 화두였는데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거다. 모든 게 다 변했다.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산동네가 없어지고 외양이 우선시되고, 치부가 있으면 가려야 할 것 같은 식의 세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여전히 일어나는 공동체가 있긴 하지만 옛날처럼 고추장비빔밥 같은 공동체는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아직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다.

-준비 중인 작품에 관해서 듣고 싶다. <송환2>와 더불어 <상계동 올림픽> 속편으로 알려진 <상계동 올림픽2>는 오랫동안 연기된 상태다.

=<상계동 올림픽2>는 이번에 했잖아. (웃음) <송환2>도 쉽게 끝내려면 할 수 있다. 북한 가는 것을 빼고. 아무튼 봉천동 철거민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는데, 난 그동안 내 추억거리만 우려먹어도 죽을 때까지 다 못한다. 정리를 힘닿는 데까지 하겠지. 영화에서 사람들이 앞에 등장하면 뒤에서 마무리를 해야 한다. 나도 그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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