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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여기서 파라다이스를 꿈꾸면 안된다

※ 이 글에는 <마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더!>

<마더!>를 보다 떠오른 건 즈비뉴 립친스키의 단편 <탱고>(1981)였다. 미국 아카데미에서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했고 어느덧 고전이 된 이 작품은 보통 ‘반복과 단절’의 주제로 읽힌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작지만 단정하게 정리된 방이 배경이다. 앞쪽으로 침대가 놓여 있고, 반대쪽으로는 문과 창이 보인다. 문은 좌우 벽에 하나씩 더 있으며, 오른쪽 벽으로는 아기 침대가, 왼쪽 벽으로는 옷장이, 가운데엔 원탁과 의자 두개가 배치되어 있다. 반복되는 탱고 음악이 흐르고 제목이 제시된 다음, 창을 통해 공이 튀어 들어오고 한 아이가 뒤따라와 공을 들고 나간다. 아이의 행동이 반복될 동안, 두 번째 인물인 여성이 뒤쪽 문을 통해 들어와 원탁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린 다음 침대에 누인다. 세 번째 인물인 검은 선글라스의 남자가 몰래 침입해 옷장 위에 놓인 꾸러미를 훔쳐 달아나자마자 네 번째 인물인 빨간 모자의 남자가 그 꾸러미를 다시 들고 와 옷장 위에 둔다. 이런 식으로 탱고 리듬에 맞춰 정확하게 새로운 인물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데, 스무명 정도의 인물이 등장하고부터는 더이상 수를 세기조차 힘들다. 마침내 방 안 가득 수십명의 인물이 움직이고 소음과 목소리가 효과음을 만들어낸다. 8분여의 상영시간이 끝날 즈음 인물들이 하나씩 사라지다 노파가 소년의 공을 들고 나가면서 영화가 끝난다. 립친스키의 정교한 작업 덕분에 수십명의 인물이 조금도 부딪히지 않으며, 좁은 방에 배치된 어떤 가구들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탱고>는 균형과 평화가 깨어지지 않는 작은 우주다.

<마더!>

애로노프스키식 카오스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이 지금껏 만들어낸 세계, 특히 <마더!>(2017)의 세계는 <탱고>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적지 않은 규모의 3층 저택에 수십, 수백명의 인물들이 침입한다. 그들은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집의 곳곳을 파괴해 거의 폐허로 만들고,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다 급기야 처형식을 치른다. 이것이 ‘애로노프스키의 혼란’이다. 그 세계는 애로노프스키의 데뷔 이후 변한 적이 없다. 문제는 혼란이 아니라 인물의 ‘행동’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유명한 글 ‘성격을 재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성격이 드러난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더!>의 예를 들면, 그(him)와 그녀(mother)가 처음으로 갈등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남자는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가 갑갑하다고 말한다. 그는 “잘될 거야”라는 그녀의 말이 언짢다. 이것은 부부의 단순한 성격 다툼이 아니다. 결말에서 신으로 밝혀지는 그는 세상을 조화로운 곳이 아닌 혼란과 파괴로 점철된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빚은) 그녀는 그의 뜻과 상반된 세상을 만들어내려 한다. 모든 소동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남편과 자신이 살아갈 공간을 ‘파라다이스’로 꾸미려고 했다. 예쁘고 말쑥한 가구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매일매일 세심하게 고른 색으로 벽을 칠한다. 두 번째 날의 소동이 끝난 뒤, 그녀는 그에게 ‘아포칼립스’를 정리하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진짜 아포칼립스가 다가오는 걸 모른다. 파라다이스로 만들고 싶었던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자신의 배에서 태어난 아기가 뜯어먹힌 뒤에도 그녀는 세상이 혼란스러운 곳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애로노프스키 영화의 비극이다.

애로노프스키식 비극은 물론 <파이>(1998)에서 시작되었다. 맥스 코헨은 수의 원리를 연구하는 수학자다. 그는 세상이 숫자의 질서와 규칙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주식시장이나 세계 경제의 규칙을 수치화하는 데 몰두한다. 수십년 전, 같은 연구를 진행했던 스승이 <마더!>의 남편처럼 세상은 질서 없이 혼돈만 가득한 곳이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마더!>의 그녀처럼 우주를 지배하는 질서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혼란과 복잡성이 세상의 원리라는 것을 거부하는 그가 경련과 두통, 우울증을 앓고 코피를 흘리며 약물과 주사에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후 애로노프스키의 인물들은 줄곧 파멸하거나 광인의 길을 걸어왔다. <레퀴엠>(2000)의 모든 인물은 약물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천년을 흐르는 사랑>(2006)의 의사는 죽음이 질병이라고 생각해 그것마저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더 레슬러>(2008)의 랜디는 자신의 심장에 상처를 가하는 게 세상이라고 생각해 링 위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 약물을 먹으며 링에 오르는 그에게, 고난의 길을 걸었던 예수가 몸으로 받아들인 흔적만이 고스란히 남는다.

<마더!>

그럼에도 애로노프스키의 인물들은 영웅의 자리에 앉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애로노프스키가 완결된 비극을 고의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평범한 인간이 절대 겪을 수 없는 굴레를 인물에게 씌워 미치광이의 상태로 이전되게 만들면서 영웅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니. 보통의 비극이 서사를 통제하고 완결하는 이유는 카타르시스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카타르시스가 애로노프스키의 비극에는 없다. <레퀴엠>이 여름에서 시작해 겨울로 끝나고 마는 게 한 예다. 그는 봄을 보여주지 않는다. 겨울이란 계절에 그들이 극한의 고통을 겪는 상황을 보여줄 뿐, 그들에게는 봄의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영화를 끝맺는다. 차라리 죽음이라도 벌어지면 인물을 평가라도 할 텐데, 그는 막다른 길 직전에 멈춰 깊은 공허 이상의 감정을 이끌어낼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한때 그가 인물과 배우를 착취하는 유의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꼭 나의 생각만은 아닌 것이, 외국의 한 평자도 <블랙스완>(2010)을 착취의 포르노그래피로 읽었다. <마더!>를 보면서 깨달은 것은, 그가 착취 그 자체를 추구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그가 착취라는 오명을 들으면서 인물을 극한으로 내모는 까닭은 무엇일까?

<희생>

지상은 파라다이스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영화는 냉정한 예술이다. 영화의 발명 이전에 사진작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말의 동작을 담았던 작업을 생각해보자. 그는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말과 기수의 움직임을 기록했는데, 설사 기수가 넘어지거나 말이 거꾸러지더라도 작업물의 시간 간격은 동일하게 유지될 것이다. 보는 사람은 물론 기록자의 심장 박동은 작업된 결과물에 반영될 수 없다. 영화의 역사가 시작됐을 때도, 예술이란 이름 아래 영화는 냉혹한 얼굴을 보여주곤 했다. D. W. 그리피스가 <웨이 다운 이스트>(1920)의 클라이맥스에서 찍은 이미지들은 현재라면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얇은 드레스를 걸친 배우 릴리언 기시가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얼음이 흐르는 강 위로 쓰러진다. 물에 머리카락을 담근 채 그녀는 폭포수 앞까지 흘러가는 얼음 위에서 연기를 계속하고, 남자배우는 더 끔찍하게도 얼음 위를 건너뛰며 그녀에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눈속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리피스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예를 이야기하는 것은, 애로노프스키의 영화에서 매번 이런 냉정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 냉정함, 착취로 오인받는 냉정함을 이야기할 때다.

<마더!>에서 남녀의 관계가 급변하는 장면은 곧바로 임신으로 이어진다. 극중 다른 부분처럼 이것도 어처구니없는 시간 개념 아래 구사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남자가 드디어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인, 즉 재현자다. 위대한 시인이었다는 그는 영화 내내 어떤 글귀도 쓰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로부터 육체관계를 못하는 점을 두고 질책을 당한다. 그랬던 그가 그녀와 관계를 가지고 그 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영감을 얻은 그는 시 한편을 쓴다. 그녀가 시를 읽고 두 사람이 손을 잡는데, 배경으로 뜬금없이 불에 탄 집과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비친다. 그림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1986년작 <희생>의 한 장면을 변형한 것이다. 기실 두 영화의 설정부터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알렉산더의 생일날, 갑작스레 세상이 3차 세계대전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종말을 막으려면 그가 하녀 마리아(<마더!>의 그녀도 성경의 마리아의 위치에 다름 아니다)와 잠자리를 한 다음 소원을 빌어야 한다. 종말의 날이 멈춘 뒤, 그는 자신의 집을 불태운다. <희생>에서 불타는 집을 마리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사진 아래)과 달리 <마더!>의 그림에서는 불타버린 집을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이 두 영화의 차이를 부른다. 타르코프스키와 <희생>이 종말의 날을 염려와 근심으로 대하는 것과 반대로, <마더!>의 (결말에서 창조자이자 신으로 밝혀지는) 그는 폐허로 된 집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신의 위치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음 숏은 하늘에서 그들의 집을 바라보는 설정이다. 아울러 이 숏은 타르코프스키의 1972년작 <솔라리스>의 결말(사진 아래)을 연상시킨다.

<솔라리스>

그렇다면 애로노프스키는 왜 신의 흉내를 내며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는 걸까. 인간은 신이 무심해 보일 때 왜 침묵하느냐고 따진다. 애로노프스키의 인물들이 그에게 던지는 질문도 같을 법하다. 적어도 그는 재현자로서 재현의 그림자 뒤로 숨어 인물에게 값싼 동정을 보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파이>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경고하다 ‘이카로스’의 이름을 말한다. 하늘 높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은 결과, 태양 가까이 다가가다 날개의 깃털이 불타 추락하는 이카로스처럼, <마더!>의 그녀는 매번 자신과 세상을 불태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다시 정리해보자. 신이면서 그녀의 남편인 척하는 그는 세상의 원리- 혼란과 파괴에 대해 매번 경고한다. 그 경고는 <마더!>뿐만 아니라 애로노프스키의 다른 영화에서도 계속 제시된다.

하지만 <마더!>의 그녀를 포함해 애로노프스키의 모든 인물들은 그러한 경고에 맞선다. 그들이 꿈꾸었던 파라다이스는 매번 거부당하고, 종래에 그들은 미쳐간다. 결국 애로노프스키의 영화를 차별화하는 것은 그러한 인물들에게서 나온다. <희생>에서 알렉산더가 했던 대사대로 이것은 ‘니체식 농담’일까. 아니면 애로노프스키는 초인적 인간에 대해 광적인 기호를 지닌 창조자일까. 하나의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이 글은 여전한 질문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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