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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파묻힌 거인>,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다혜 2017-11-06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 시공사 펴냄

그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뱃사공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 어느 노부부는 뱃사공에게 섬으로 데려다달라고 청했는데, 남편을 먼저 태우고 간 뒤 뱃사공은 노파를 섬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뱃사공의 말은 이렇다. “가끔 부부가 함께 섬으로 건너가도록 허용되기도 하지만 드문 일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 대단히 강한 사랑의 유대가 있어야 하지요. 그런 일이 더러 있다는 거 부인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 심지어는 결혼하지 않은 연인이라도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건너가려고 기다리는 걸 보면 꼼꼼하게 확인해야 하는 게 우리 의무지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에 등장하는 뱃사공의 이야기는 그의 전작 <나를 보내지 마>를 연상시킨다. 그 작품에서는, 두 연인이 정말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면, 그들에게 운명지워진 장기기증을 얼마간 뒤로 미룰 수 있으리라는 도시전설 같은 소문이 등장한다. 뱃사공의 이야기에도, 이 소문에도, 당신은 묻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면 그 사랑이 진짜인지 어떻게 확인하나요?(나아가, 사랑을 증명하면 기회를 준다는 당신의 말은 진실인가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는 게 <파묻힌 거인>의 줄거리다. 배경이 되는 시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아득한 과거. 아서왕과 관련된 사람들이 살아있고, 전사들이 마을을 지키고, 도깨비와 용이 존재하는 판타지의 공간이다. <남아 있는 나날>이 시대물, <나를 보내지 마>가 SF, 그리고 <파묻힌 거인>이 판타지가 되는 셈인가. 주인공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이 주어지고 외부의 변수가 적으니, 읽는 쪽도 본질적인 질문에 집중하게 된다. 소설 초반부터 사람들의 기억을 빼앗아가는 안개와 그로 인해 거의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해낼 수 없는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관계 그리고 기억에 대해서. 비어트리스에게 던져진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어떻게 서로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보일 거예요?”라는 질문처럼, 기억은 존재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혹은 망각은.

아들을 찾아 나선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망각한 것을 기억해내지 않고도 두 사람은 앞으로 갈 수 있을까. 뱃사공은 액슬과 비어트리스를 한번에 태워줄까. 그 모든 일을 기억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안개가 걷히면, 무엇이 드러날까. <파묻힌 거인>을 읽는다는 것은, 기억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것들이 소환하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윤곽을 확인하는 일이다. “어느 경우든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던 한 과정의 일부다.” 그러니 때로는 기억보다도 망각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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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파묻힌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