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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된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들 중 놓치기 아까운 수작들
김현수 2017-11-27

클래시컬한 즐거움

<패딩턴발 4시50분>

애거사 크리스티가 발표한 작품 중 소설과 연극을 통틀어 지금껏 영화화 된 작품은 원작으로 삼았거나 혹은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까지 합하면 거의 100여편에 가깝다. 전체 소설의 총 판매 부수는 세계에서 성서와 셰익스피어 다음 3번째로 많이 팔린 작가로 기네스북에 올랐을 만큼 잘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영화계로선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었으리라. 1928년 단편집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의 첫 번째 수록작인 <퀸의 방문>이 영화화된 뒤 지금껏 수많은 그녀의 작품들이 영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앞다투어 영화화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완성도와 재미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작품을 골라 소개한다.

<패딩턴발 4시50분>(1961) Murder, She Said

포와로와 함께 주목해야 할 애거사 크리스티의 주요 캐릭터 미스 마플을 연기하는 마거릿 러더퍼드는 첫 번째 데뷔작인 이 영화를 포함해 모두 4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중 <패딩턴발 4시50분>이 가장 큰 호평을 받았다. 기차를 타고 가던 미스 마플은 하필 괴한이 젊은 여성을 살해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런데 기차에서 시체가 없다는 걸 알고는 시체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이때 경찰은 증거가 없다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녀는 분명히 시체가 있다고 예상되는 바로 그 집에 하녀로 취직한 뒤 다음 사건을 추리하기 시작한다. 원작과 영화의 장르적 분위기가 조금 다른데 애거사 크리스티 특유의 서스펜스와 어두운 기운 대신에 영화는 비교적 밝은 블랙코미디에 가깝게 묘사됐다. 배우 마거릿 러더퍼드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이 영화를 챙겨볼 이유는 충분하다.

<정부>(1957) Witness for the Prosecution

빌리 와일더 감독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검찰측의 증인>을 영화로 만든 법정 드라마라는 사실 자체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막상 보고 나면 그 완성도에 깜짝 놀랄 거다. 건강상의 문제로 병원에서 이제 막 퇴원한 법정 변호사 윌프레드 경(찰스 랭튼)은 다른 원작 영화로 비교하면 포와로의 기능을 하는 인물. 그가 억울한 살인사건 누명을 쓰고 찾아온 레너드 볼이란 남자의 사건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레너드 볼이 우연한 계기로 돈 많은 프렌치 부인(노마 바든)을 알고 지내다가 그녀의 강도 살해 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자 윌프레드 경이 그를 변호해주기로 하는데, 법정에 가기 전까지 그리고 법정에 가서도 이상한 변수가 튀어나온다. 그 변수가 이 영화의 백미다. 매사에 깐깐하며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의 윌프레드가 몸에 안 좋은 술과 시가를 즐기면서 법정 밖에서 사건을 추론해가는 전반부와 법정에서 그가 증인들과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면서 진실을 찾는 후반부로 이뤄진다. 법정 드라마로서 아주 뛰어난 플롯과 대사를 갖췄고 마지막 반전은 기가 막히다.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위대한 미국영화 법정 드라마 부문 6위에 올랐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극장 문을 나서면 영화의 결말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아달라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나일 살인사건>(1978) Death on the Nil

이집트 나일강을 배경으로 초호화 유람선에서 부유한 상속녀가 잠을 자다 총으로 살해당한다. 그리고 총은 사라졌다. 물론 범인은 아직 배 안에 있다. <타워링>을 연출한 존 길러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스타들의 멀티 캐스팅을 시도하는 등 제작 면에서 4년 전에 히트친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비슷하게 만들어보려는 시도가 보이는 작품이다. 탄탄한 플롯과 인물, 배경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명망 높은 집안의 상속녀 린넷(로이 차일스)은 친한 친구 재키(미아 패로)의 남자친구였던 사이먼(사이먼 매코킨데일)을 가로채 그와 결혼을 한다. 이에 미쳐버린 재키는 린넷과 사이먼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여행을 훼방놓는다. 어느 날 밤 린넷이 살해당하자 재키를 둘러싼 모든 유람선 탑승객이 용의자가 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유사한 전개, 유사한 캐릭터 등 여러모로 속편의 느낌을 풍기게 한다. 제인 버킨, 베티 데이비스, 미아 패로, 올리비에 허시, 매기 스미스 등의 스타들과 TV시리즈에서 미스 마플을 연기한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주인공 안젤라 랜스베리도 출연한다. 이 영화는 제5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의상상을 받았다.

<거울 살인 사건>(1980) The Mirror Crack’d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007 골드핑거>(1964),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등 ‘007’ 시리즈를 줄줄이 연출했던 가이 해밀턴 감독이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이 영화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포와로와 함께 탄생시킨 또 한명의 캐릭터 미스 마플이 사실상 주인공인 이야기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 할리우드에서 영화 촬영을 위해 스타들이 대거 방문한다. 그런데 주연 여배우인 마리나(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롤라(킴 노박)는 마리나의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제이슨(록 허드슨)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던 중 마을 사람들과 파티를 열다가 마을 사람 누군가가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미스터리영화 추리의 귀재인 미스 마플(안젤라 랜스베리)이 사건을 기가 막히게 추리하는 과정은 여타의 스릴러영화에서 느껴지는 긴박한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마루에 앉아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혹은 태평하게 잠을 자다가 적절한 추리가 번뜩 떠오르는 마플 부인의 느긋한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 국내에서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벽속의 거울>이란 제목으로 VHS가 출시된 적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백주의 악마>(1982) Evil Under the Sun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나일 살인사건>처럼 상류층 사람들이 외딴곳에 모이는 인물 구성, 사랑과 돈이 얽히고설킨 관계라는 플롯 구성,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배경 구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또 한편의 수작. 기차나 유람선처럼 좁은 공간이 아니라 외딴섬의 고급 호텔이라는 공간 배경이 볼거리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다양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추리 서사로서나 영화적으로나 만족스러운 조건을 갖춘 작품이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아드리아섬에 위치한 초호화 호텔인데 이곳에 여배우 알레나(다이애나 리그)와 남편 케네스(데니스 퀼레이), 의붓딸 린다(에밀리 혼) 가족을 비롯해 알레나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별도의 사건을 추적하다 이곳에 머물게 된 포와로가 알레나와 관계된 사건도 함께 추리해나간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피터 유스티노프가 두 번째로 포와로를 연기하며, <나일 살인사건>에 참여했던 각본가 앤서니 섀퍼가 각본에 참여했다. <백주의 악마> 역시 스쳐 지나가듯 보이는 모든 장면에 단서가 있고 포와로의 추리가 있기 전에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애거사 크리스티 시리즈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포와로와 마플>(2004)

애거사 크리스티는 단 한번도 작품에서 포와로와 미스 마플을 같이 등장시킨 적이 없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에서는 가능했다. 2004년 일본 <NHK>에서 제작한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포와로와 마플>은 그녀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옴니버스 형태의 시리즈다. 연출은 <베르세르크>를 제작한 다카하시 나오히토가 맡았다.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에서 2006년에 방영했다. 주요 내용은 소설 <ABC 살인 사건> <엔드하우스의 비극> <구름 속의 죽음> 등을 섞었고 아무래도 TV 시청 연령대를 고려해 분위기는 밝게 묘사했다. 원작에 없던 마플의 조카손녀면서 포와로의 조수이기도 한 메이블 웨스트가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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