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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세렌디피티
2002-04-16

시사실/ <세렌디피티>

■ Story

크리스마스 무렵의 백화점, 마지막 남은 장갑을 사기 위해 동시에 손을 뻗은 사라(케이트 베킨세일)와 조너선(존 쿠색)은 한눈에 호감을 느끼고 낭만적인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낸다. 헤어질 무렵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조나선에게 운명론자인 사라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즉 조나선의 연락처를 쓴 5달러 지폐를 그 자리에서 당장 써버리고, 자신의 연락처를 쓴 책을 헌 책방에 팔아버리자고. 만약 이 지폐와 책이 다시 서로의 손에 들어오면 자신들은 진짜 운명의 상대일 거라고.

■ Review <세렌디피티>를 보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겨울 뉴욕의 풍경,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진 두 남녀, 그리고 ‘운명’ 혹은 ‘우연’이란 단어의 반복. 하지만 “운명이란 건 인간이 발명한 말일 뿐이야.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으니까”라며 일면식도 없는 사랑을 찾아 시애틀로 그리고 뉴욕으로 날아갔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씩씩한 애니(멕 라이언)와 다르게 <세렌디피티>의 사라는 “우연이 아니야,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렸어”라며 몇년간을 그 운명의 계시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시애틀…>이 설파했던 능동적 운명개척론을 부정하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몇년 동안 헤어져 살아가던 사라와 조너선이 뉴욕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서로를 찾아 떠나가는 순간을 기점으로 10년 가까이 된 ‘로맨틱코미디의 교과서’가 여전히 개정보수판을 낼 필요가 없음을 증명해나간다. 몇년 전 구멍가게에서 써버린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5달러가 헤드폰값을 지불하려는 친구의 지갑 속에서 튀어나온다는 운명이나, 헌 책방에 팔았던 그녀의 연락처가 적힌 책을 결혼식 전날 약혼녀로부터 선물받는 운명을 만들어낸 것은, 백화점 창고를 뒤지고 뒤져 그녀가 남긴 크레디트카드 영수증을 찾아내는 수고와 지저분한 브루클린행 전철을 타고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룸메이트를 찾아내는 정성과 결혼식을 앞두고 과감히 그가 있는 도시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그렇게 <세렌디피티>는 사랑과 열정이 죽어버린, 안전한 운명에 안주해 있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아프지 않은 채찍질이다. 백은하 luc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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