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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적인 것’의 악마화
문강형준(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7-12-14

대학 캠퍼스 어디에서나 중국어가 들린다. 중국 유학생, 이들은 대체로 강의실 맨 끝에 앉아 있고, 시험에서는 백지를 낼 때가 많으며,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는다. 이 학생들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중국인 유학생을 강력히 유치한 주체는 ‘글로벌화 점수’를 통해 대학 순위를 높이고 싶었던 한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에서 중국인 학생은 거의 완전히 소외되어 있고, 오직 자신들이 만든 커뮤티니 속에서만 살아가는 듯 보인다. 드디어 최근에는 학교 내 중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혐오 발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흥행한 영화 <범죄도시>와 <청년경찰>에는 ‘중국 동포’가 모두 악의 축으로 등장한다. 각각 가리봉동과 대림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에서 악한 역할은 중국 ‘건달’이 맡고 있지만 사실 이 악은 ‘중국적인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 중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더럽고, 야만적이고, 시끄럽고, 무자비한 모든 것들이다. 도끼를 휘두르며 신체를 훼손하는 원초적 폭력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두려움은 결국 한국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북유럽적이고, 아메리카적인 세련됨과 첨단성이 중국적인 것 앞에서 위태로워지는 두려움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하락의 불안감이 거기에 있다.

이전까지 ‘악’은 내부에 있었다. 한국영화의 대표적 장르인 ‘깡패영화’에서 깡패들은 악으로 표상되지만, 그 깡패는 또한 내 이웃이며 친구였다. 그래서 깡패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밉지만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고, 짠한 감정이입이 있었으며, 선과 악 사이에서의 고뇌와 분열이 있었다. <범죄도시>나 <청년경찰>에서 북한식 말투를 쓰는 중국적인 것의 악에게는 공감할 만한 그 어떤 내면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완벽한 ‘외부인’이며 ‘괴물’이다.

괴물이 된 중국적인 것의 폭력과 맞서는 이들은 형사 혹은 경찰대학생들이다. 이들이 힘겨운 노력 끝에 중국 건달들을 제압하고, 선량한 조선족(소년)과 한국인(젊은 여성)을 구출할 때 우리가 받는 카타르시스의 정체는 뭘까? 그것은 그저 악에 대한 선의 승리라는 원형적 이항대립에서 오는 기쁨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저 더럽고 야만적인 중국적인 것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깔끔하게 제거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맞을 것이다. 더러움과 무질서와 무법성에 맞선 깨끗함과 질서와 법의 승리, 게다가 소년과 젊은 여성이라는 희생자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고 끝내 구원을 달성하는 강력한 남성 전사- 전형적인 우파 서사의 탄생이다. 문제는 우리가 결코 깨끗함과 순수함을 지킬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시대는 더욱 그렇다. 온갖 것들이 섞이는 삶을 살아야 할 때, 온전했던 내가 하강하고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만연할 때, 혐오 역시 창궐한다. 내부에 있었던 혐오 대상은 서서히 외부의 침입자에게로 바뀌는 중이고, 우리에겐 이들과 맞설 강력함이 필요하다. 근육 자체가 아이콘인 ‘마동석’의 인기는 바로 이 강력함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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