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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①] 감독이 쓴 책들 - 박남옥·오즈 야스지로·연상호·고레에다 히로카즈
김성훈 사진 백종헌 2018-01-29

사적인 고백

영화감독은 영화로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감독이 직접 쓴 책은 많지 않다. 박남옥, 오즈 야스지로, 연상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4명의 영화감독이 쓴 책이 반가운 것도 그래서다. 박남옥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고, 오즈 야스지로가 쓴 책은 생전 그가 쓴 글들을 묶어낸 것이며, 연상호 감독이 쓴 책은 새로운 창작물임을 미리 밝혀둔다.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지음 / 마음산책 펴냄

그는 언제나 아기를 포대기로 싸 업고 있었다. 첫 연출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을 찍을 때 돌도 안 지난 아기를 맡길 데가 없어 업은 채 촬영장을 누볐다. 매일 아침 아기를 업고 시장에 가 장을 본 뒤 배우와 스탭에게 먹일 점심을 마련했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고향 대구와 촬영지 부산을 오갔다. 온갖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영화를 찍었던 이 사연의 주인공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다.

박남옥이 업고 다닌 딸 이경주씨가 생전 어머니가 써놓은 원고를 일일이 타이핑해 옮긴 책 <박남옥>은 기가 차고 눈물도 차는 박남옥 일대기다. 전쟁 때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1950년대 충무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만들었던 영화 <미망인>의 메이킹필름이기도 하다(<미망인>은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다가 1997년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편집자).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영화, 미술, 무용 등 예술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았던 만능 소녀였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영화 포스터를 사랴, 영화잡지에서 신일선·복혜숙·김소연·김신재·문예봉 등 영화배우 사진을 스크랩하랴, <수업료> <집 없는 천사> <수선화> <풍년가> 등 한국영화의 신문광고 사진을 모으랴 혼자 바빴던 원조 영화 ‘덕후’였다. 특히 일제시대 조선영화의 최고 스타 배우였던 김신재의 열렬한 팬이었다.

손수건을 꺼내야 하는 대목은 해방과 함께 박남옥이 광희동 촬영소에 입사해 영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다. <자유만세>(감독 이규환, 1946) 녹음 작업을 시작으로 편집조수로 일하다가 배우 최은희의 데뷔작인 <새로운 맹서>(감독 신경균, 1947)에서 스크립터를 맡으며 촬영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이후 부모님의 강요로 고향 대구로 귀향하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1953년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를 누비며 기록 영화를 작업했다. 전쟁이 끝난 뒤 친언니로부터 거금 380만원을 빌려 남편이자 시나리오작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로 <미망인>을 찍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망인> 이후 그는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가업인 동아출판사 일을 하면서 1960년 창간된 영화잡지 <씨네마 펜> 편집장으로 영화에 관한 글을 쓰다가 영화계를 떠났다.

영화계에 배우 말고는 여성이 전무했던 그때 그 시절, 영화 현장에서 분투했던 박남옥의 몸부림은 울컥하기 전에 존경심이 먼저 든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감독이 손에 꼽을 만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요건 몰랐지?_ 박남옥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남자가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다. <라쇼몽>(1950), <7인의 사무라이>(1954), <요짐보>(1961) 등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대배우다. 미후네 도시로 옆에서 웃고 있는 남자는 한국 배우 김진규(<하녀>(감독 김기영, 1960), <오발탄>(감독 유현목, 1961) 등 출연). 1960년 4월 도쿄아시아영화제 파티에서 찍힌 사진인데 박남옥은 “이 사진이 마음에 들고 평생 가보처럼 간직했다”고 말했다.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지음 / 마음산책 펴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62년작 <꽁치의 맛>은 꽁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영화다. 오즈가 도호에서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을 촬영하던 중, “쇼치쿠가 빨리 다음 작품의 제목을 정해달라고 재촉해 어쩔 수 없이 정한 제목”이라는 게 노다 고고의 회상이다(노다 고고는 <만춘>(1949) 이후 오즈의 유작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오즈와 평생을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 작가다.-편집자). “그저 꽁치를 화면에 보이지 말고 전체 느낌을 그런 식으로 하자는 의도로 지은” 제목이라는데, 이 사연을 알고 나니 책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또한 꽁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지만 읽고 나면 꽁치가 막 생각나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가 시대극으로 할리우드와 유럽을 매혹하고 있을 때조차 오즈는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급변하는 격랑의 시대에 오즈 영화의 인물들은 다다미에 가지런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가족과 결혼과 장례를 천천히 논했다.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는 생전 오즈가 일본 영화잡지 <키네마준보>를 포함해 여러 매체나 책에 썼던 산문, 편지,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평, 대표작 <동경 이야기>(1953) 감독용 각본을 모아 낸 책이다. 잘 알려진 대로 오즈는 1937년 9월 입대해 전쟁터인 중국 상하이에 상륙한 뒤 1939년 6월까지 중국 각지를 거듭 옮겨다니다가 일본으로 귀환했는데, 이 시기 노다 고고, 영화평론가 하즈미 쓰네오와 주고받은 귀중한 편지들과 종군일기가 이 책에 실렸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오즈는 친구들과 편지를 부지런히 주고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백만냥의 항아리>(1935)와 <인정 종이풍선>(1937) 연출)의 병사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져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내준 소설, <키네마준보>를 읽으며 적적한 밤을 달랬다. 이 편지 중 일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내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는데, 일본군 위안소 운영과 관련된 세세한 내용들도 기록돼 있다. 물론 오즈는 위안소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싫어했던 것 같다. 또 오즈가 <오차즈케의 맛>(1952)부터 <가을 햇살>(1960)까지 자신의 영화에 평을 단 ‘오즈씨의 회고’(<키네마준보> 1960년 12월 증간호에 실렸다)는 오즈의 영화를 볼 때마다 참고하면 그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1959)

요건 몰랐지?_ <안녕하세요>(1959)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이야기다. 인간 무리라는 것은 시시한 얘기는 늘 주고받지만 막상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면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협회 같은 데 가서 이 스토리를 이야기하면 모두 재미있다고 하지만 막상 손을 대지 못해 “역시 내가 해보자”하고 결심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얼굴>

연상호 지음 / 세미콜론 펴냄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서울역>(2016) 등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섬뜩하다. 위선적이고, 욕망이 필터를 지나 그대로 말이나 행동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전작이 그랬듯이 연상호 감독의 첫 그래픽노블 <얼굴> 속 인물들도 그렇다. 임영규는 시각장애라는 한계를 이겨내고 자그마한 도장가게를 캘리그래피 연구소로 키우는 데 성공한 전각 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아버지 임영규와 단둘이 살아온 임동환은 자신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한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는다. 그 시신은 신시가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야산에서 발견됐는데, 죽은 지 30년이 더 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함께 발견된 주민등록증을 통해 임동환의 어머니임이 밝혀질 수 있었다. 임동환은 다큐멘터리 PD 김수진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추적하기로 한다. 어머니의 가족, 직장 동료를 만나 알게 된 진실은 임영규, 임동환 두 부자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못생긴 괴물’로 기억되는 어머니 정영희의 삶을 추적해 맞닥뜨린 풍경은 개발 광풍이 거세게 불었던 1970, 80년대 한국 사회와 그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한 가정이었다. 노동과 개발만을 미덕으로 삼던 그때 그 시절은 ‘내 얼굴이 어때서!’라고 대들 수 있는 용기도, 주변 사람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인권도 허락되지 않았다. 임동환이 마주한 젊은 시절 어머니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았고, (못생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결혼해 밤낮으로 노동만 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세상을 떠났다.

감독의 전작 애니메이션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그림체라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지만, <얼굴>은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통틀어 연상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그다운 색깔이 진하게 묻어난 작품이다. 대체 어머니 정영희의 정체가 무엇인지 긴장감을 가진 채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확인한 그의 맨 얼굴은 책을 덮은 뒤에도 가슴 한켠을 먹먹하게 한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도, 영화로도 만들어지길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요건 몰랐지?_ <얼굴>은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과 <사이비>가 끝나자마자 떠올린 이야기다. <사이비> 다음 장편애니메이션으로 염두에 두었지만 <서울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연 감독은 <부산행>을 만들었고, 불안한 마음에 오래 묵혀뒀던 <얼굴> 시나리오를 들추게 됐다. <염력>의 프리 프로덕션이 끝나기 전에 <얼굴>을 세상에 내놓겠다고 결심했고, 그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유롭게 작업했다”는 게 그의 얘기.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바다출판사 펴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인 시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연출 경력을 시작했다. 거장의 신인 시절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있을 것 같지만 정반대다. 그의 연출 데뷔작 <지구 ZIG ZAG>(1989)는 대학생이 해외에 나가 홈스테이를 하면서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내용의 방송 다큐멘터리다. 짧은 체류 기간 안에 방송에 내보낼 만한 사건을 연출해야 하는 상황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현지인이 제작진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거나 주인공 대학생이 제작진의 기대와 딴판이라 낭패를 당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이 실패기는 28살의 그에게 취재 대상에 대한 ‘공작(연출)’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져주었는데, 이 질문은 훗날 그가 극영화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방송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신인 시절부터 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1995), 칸국제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아무도 모른다>(2004), 최근작 <태풍이 지나가고>(2016)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생각한 것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자서전보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음성 코멘터리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등 그의 대표작에 얽힌 비화들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침팬지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한 아베 히로시를 보고 풍채는 근사하지만 멋이 없는 주인공 료타 역을 떠올렸고(<걸어도 걸어도>), 현장에서 좀처럼 엔지를 내지 않는 배두나에게 어째서 연기 엔지가 없는지 물었다가 “한국의 영화현장에서는 나 같은 신인이 엔지를 낼 여유가 없으니 거기서 단련되었다”는 대답을 듣고 감탄했다(<공기인형>). 기획부터 시나리오 작업, 캐스팅, 현장에서의 연기 디렉팅까지 각 과정에 대한 고민들이 무척이나 솔직하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건 그가 다큐멘터리를 찍던 시절이다.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는 미나마타병 화해 소송의 국가쪽 책임자였던 한 관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사건을 ‘피해자인 시민’과 ‘가해자인 국가(복지 행정)’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다루지 않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관료의 사연을 중심으로 사건을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카메라와 대상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바탕에는 저널리스트적 면모가 깔려 있고, 그런 면모가 어쩌면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요건 몰랐지?_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걸어도 걸어도>에서 시도한 것 중 하나는 감독 조수 시스템이다. 기획부터 자료 리서치, 촬영, 편집, 마무리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감독 옆에서 경험하게 하고 감독에게 언제, 어떤 의견이든 말해도 좋은 역할이다. 조감독과는 다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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