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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 연상호 감독, "결국 진짜 빌런은 보이지 않는 체제다"

<부산행>의 흥행 성공은 기념비적이었다. 마켓은 부디 ‘제2의 <부산행>’을 내놓으라는 아우성으로 과열되었다. 덕분에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부산행>과 비슷한 한국 감독의 액션 블록버스터라면 환영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시장이 아시아 블록버스터의 또 다른 신화를 쓰려 요동칠 때 정작 창작자인 연상호 감독은 이미 <부산행>을 떠나 있었다. “<부산행2>를 다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전작의 범접할 수 없는 성공으로 다소 여유롭게, 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깊게 담아낼 차기작의 기회.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에 연상호 감독은 다분히 용산참사를 연상시키는 철거민 문제를 바탕으로한 코믹 판타지물 <염력>을 선보였다. “<염력>은 흥행 안 되면 조롱받기 십상인 영화다. 그래서 하고 싶더라. 영화를 하다보면 조롱받기 싫어진다. 그런데 그걸 겁내기 시작하면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염력>의 흥행 성패나 평가를 떠나서, 창작자 연상호를 지지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부산행>의 흥행 성공이 가져온 부담감을 안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들려왔다. <부산행>이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나.

=난 좋았다. (웃음) 그런데 공황장애로 약먹는다, 사람들을 회피한다는 이야기가 돌더라. 방송 출연을 거절한다고 했던 말이 와전된 것 같다. 물론 전보다 생각은 많아졌다. 그간 칸국제영화제에 간 감독, 흥행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할리우드 에이전트, 제작사 등에서 연락도 왔다. 어리바리하다가 이 기회들을 다 놓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런데 <부산행>의 성공은 100% 운이었다. 칸국제영화제 간 것도 마찬가지고. 내 기준으로는 <돼지의 왕>(2011)보다 <사이비>(2013)가 더 좋은데, <사이비>는 칸국제영화제에 못 가고 <돼지의 왕>은 갔다.

-<부산행> 이후 시장의 기대는 확연해 보였다. 그동안 이른바 <부산행2>, 아시아 시장에 반향을 일으킬 또 하나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요구와 부담이 전가됐을 거다.

=투자사는 <부산행2>나 그 연장선의 영화를 하길 원했다. 나는 <염력>을 원했다. <염력>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내가 갈 길에 대한 불안감은 다 정리가 됐다. 요새는 영화가 단기상품처럼 한방에 막 이익이 되고, 대박이 나고 안 나고가 중요해진 시대인데 <염력>은 그쪽 길로 가지 않겠다는 다짐같은 영화다. 고민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지금은 잊혀진 영화를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게 바로 코미디였다. 내 나이의 감독들이 20대 초반에 본 영화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맨?>(1995) 같은 영화였다. 이후에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지구를 지켜라!>(2003) 같은 영화에 열광했는데, 지금은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기 힘들다. 미국영화들도 피터 잭슨의 <고무 인간의 최후>(1987), <데드 얼라이브>(1992)같은 영화를 좋아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영화다. 그렇게 내가 영향을 받은 영화들을 닮은 영화를 한번 만들어보자 했다.

-<부산행>의 흥행 성공이, 먼저 연출했지만 개봉은 뒤늦게 한 <서울역>(2016)의 스코어와 <염력>의 제작 성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염력>의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투자사 설득이 쉽지 않았다’는 말이 이해가 가는 지점이 영화에 다분히 보이더라.

=<부산행> 때 좀비영화를 한다고 하니 한국에서 좀비물은 안 된다, 예산이 많이 들고 대중적이지 않다, 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난 <워킹 데드>나 좀비 소재 웹툰들의 영향으로 이미 젊은 친구들이 좀비를 받아들이고 있던 때라 젊은 층을 움직이는 건 가능하다고 봤다. <부산행>의 성공이 있어서 <염력>의 초능력은 쉽게 받아들여진 편이다. 문제는 그걸 B급 코미디로 만든다는 거였다. 이게 한국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이미 해외 영상물이나 넷플릭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를 보면 키치적인 유머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예전에 나온 B급 유머도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싶었다.

-작품 착상에 있어서 초능력이 먼저였나, 재개발 관련한 문제들이 먼저였나.

=동시다발적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초능력을 가져왔나, 아니면 초능력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가져왔나를 돌아보면 그렇다. 도시 개발에서 벌어지는 철거 문제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합의가 안 되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민주화가 공동의 합의를 이루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상업영화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철거 이슈들은 이미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1988) 때부터 있어왔다. 당시 창작자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철거가 대다수의 국민의 지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가령 올림픽을 위해서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석헌(류승룡)의 초능력은 약수터의 약숫물로부터 온다. 약숫물에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약수터가 재밌더라. 왜 우리 아버지는 그걸 무겁게 새벽부터 떠올까. 일종의 신앙 같은 걸 텐데, 많은 사람들이 약수에 효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한국적인 문화다. 비닐하우스 교회(<사이비>) 같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를 가져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초능력을 얻는 데 그렇게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가 없는데, <크로니클>(2012)에서 운석에 그냥 손을 대서 능력을 얻은 고등학생들처럼, 그걸 약수로 설정한 거다.

-석헌이 구사하는 염력의 세기는 어느 정도로 설정했나. 단순히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서 시작해 공중부양까지 하니 슈퍼파워에 가깝다.

=석헌이 쓰는 염력은 시위의 상징으로 봤다. 시위를 보면 어떤 상황 앞에서 조금씩 방법을 달리하다가, 어떤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끝까지 갈 것인가 여기서 그칠 것인가. 시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국민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인데, 이걸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를 염력의 정도로 상징해봤다.

-CG의 비주얼적인 구현은 세련됨에서 벗어난다. 의도적으로 아날로그적이고 다소 거친 화면을 택한 것 같다.

=그렇게 화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파이더맨처럼 카메라를 1인칭으로 하는, 그런 정도는 생각 안했다.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망원렌즈를 쓴 컨셉으로 많이 가져갔다. <염력> 하면서 떠올린 게 <병태와 영자>(1979)에서 병태가 자동차와 달리기하는 장면이었다. 요즘은 핸드헬드로 찍는데 그때는 배우한테 뛰라고 하고, 멀리 있는 건물에서 망원렌즈로 찍었다. 그러니 당연히 통제가 잘 안 되는데 보면 그 결과물이 그리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요즘 영화처럼 화려한 것은 석헌의 능력이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더라. 석헌의 염력이 아니라 석헌이란 캐릭터가 염력을 썼을 때의 느낌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홍 상무(정유미)는 루미(심은경)를 비롯한 철거민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그 역시 뱀의 머리는 아니다. 자본의 속성과 재개발에 목을 매는 체제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홍 상무의 차가 벤츠가 아니라 그보다 더 비싼 벤틀리 정도는 돼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있는데, 난 벤츠 정도라고 봤다. 어쩌면 홍 상무도 석헌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지옥도> <서울역> <부산행>을 봐도 지금까지 내 영화에서 적의 존재가 드러난 적은 없었다. <부산행>도 용석(김의석)이 빌런일 수 있는데, ‘을과 을’의 싸움 혹은 ‘을과 병’의 싸움이었다. 한국적인 빌런을 어떻게 만들 거냐 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을 보면 초인뿐 아니라 빌런도 능력을 갖는 과정을 같이 보여주는데, 나는 그걸 피하고 싶었다. 홍 상무가 빌런을 대표해 나온 거고, 결국 진짜 빌런은 보이지 않는 체제다.

-그래서 선이 악을 통쾌하게 처단하는 방식의 카타르시스는 이번에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걸 노린 것 같다. 빌런의 존재가 드러나고 영화적으로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난 초등학생 때 <은하철도 999> <미래소녀 코난>을 보면서 자랐는데, 어느 순간 상업진영에서는 그런 작품이 없다. 더 강하게, 더 명확하게 만드는 게 상업영화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시대다. 나는 오히려 내가 좋아했던 그런 영화를 좀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었을 때, 흥행을 떠나 전체 한국영화 지형에서 툭 튀어나온 이질적인, 많이 이야기되고 회자되는 영화가 되었으면 했다. 이 영화를 보게 될 어린 친구들에게는 특히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용역깡패에 의한 철거민의 죽음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용산참사를 유추하게 하는 극도의 현실이 바탕이다 보니 여기에 코믹 판타지를 접목하는 것이 조심스러울수도, 이질적일 수도 있다. 웃음 지점의 상한선은 어떤 기준으로 설정했나.

=어떤 사안을 다룰 때 그 사안에서 보여줘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 윤리의식에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는 어느 정도 가도 된다고 생각한다. 철거민, 경찰, 하다못해 용역깡패까지도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를 악마로 그리는 건 택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건 시스템의 잘못이지 인간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만 지켜지면 가볍고 무겁고는 중요하지 않다. 톤 앤드 매너가 라이트하다고 그 내용도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1988)의 도시 배경에 기타쿠보 히로유키의 <노인Z>(1991) 같은 코믹적 톤을 버무렸다.

=<노인Z>를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 같다. 어릴 때 오토모 가쓰히로를 무척 좋아했는데, <노인Z>가 한국에 불법으로 소개되면서 마치 오토모의 작품처럼 소개되었다. <아키라>보다 그림 퀄리티도 안 좋고, 그 음습함도 없어 처음엔 실망이 컸다. 그런데 자꾸 보게 되더라. 딱히 악한 캐릭터도 없고, 진지한 사회문제를 가볍게 그려낸 신박함이 맘에 들었다. 그런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내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의 도움주신 분들을 보면 <공동정범>(2017)을 연출한 김일란·이혁상 감독이 있다. 용산참사를 직접 내세우지 않지만 스토리에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공동정범>은 세번을 봤고, 철거민을 연기한 배우들한테 이 영화를 보여주면 좋겠다 싶어서, 대관해서 배우와 스탭들과도 봤다. 용산 말고도 쌍용차 파업 등 여러 사건들의 이미지를 사용하긴 했다. 그렇다고 자료조사까지 하고 가면 영화의 톤이 너무 심각해지겠더라. <PD수첩>이나 용산참사 1주기를 맞아 펴낸 만화가들의 옴니버스 프로젝트 <내가 살던 용산> 같은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

-<공동정범>을 추천하는 홍보 영상에 출연해서 “예술이 사회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라는 의견을 전하던데, <염력>에서도 그런 예술의 지향점을 나누어 갖고자 한다는 생각이 든다.

=‘원기옥’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용산참사를 생중계한 <칼라티비>였다. <내가 살던 용산> 같은 건 판매율이 저조했지만 나는 그게 가치가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봤기 때문이다. 거기서 모티브를 얻어 몇년에 걸쳐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걸 소재로 한 대중 영화를 만들었다. 아직도 용산 관련해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고, 어느 순간 유의미한 결론이 날 때까지 관심을 가지려 한다.

-석헌으로 대표되는, 패배감을 가진 40대 중년 남성이 철거민 딸을 돕는 과정에서 각성하는 서사는 <사이비> <부산행>에서도 엿보이는 구조다. 실제 그 나이대의, 자식이 있는 아버지인 자신이 반영되는 지점도 있을 것 같다.

=누가 ‘연상호는 아저씨를 사랑하나보다’라고 하는 걸 봤다. (웃음) <사이비> 때부터는 쭉 아버지-딸 구도인데 그만큼 40~50대 한국의 아저씨 캐릭터를 좋아하긴 한다. 대개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 남편이 되고자 하지만 잘 안 되니 항상 충돌한다. 복지나 시스템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긴 쉽지 않고, 그런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나도 옛날엔 아버지를 미워하기도 했는데, 나이가 드니 비슷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대다수의 아버지들이 사회에서 얻은 게 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맥락에서 결과물이 이어진 것 같다. 다만 지금 나온 작품들이 이미 이전에 기획된 작품이고, 몇년 전만 해도 영화산업 내에서 40대 남성이 주인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게 문제되지 않아서 비판의식을 크게 갖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이상 이런 인물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 연출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다다쇼의 애니메이션 제작 계획도 궁금하다.

=이성강 감독의 장편영화 제작 마무리에 전념하고 있다. 연출작은 실험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이 있는데, <염력>의 흥행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굳이 해보고 싶은 건 <플라이>(1986) 같은 80년대 스타일의 호러영화다. 작품마다 의미를 많이 담지 않으려 한다. <부산행> 때도 첫 실사영화라는 기대를 많이 해주셨는데, 난 그냥 ‘내 세 번째 영화다’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그래픽노블 <얼굴>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걸 원작으로 해 영화화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래픽노블은 산업적인 측면은 아니었고 순수하게 내가 보고 싶은 만화를 해보자고 생각해서 시작했다. 옛날에 쓰던 시나리오인데, 아무도 안 보더라도 완성해보고 싶었다. 보시면 알겠지만, 영화화하기는 힘든 이야기 전개라 다들 이건 투자 못하겠다고 한 작품이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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