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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
이화정 2018-02-21

훈훈하게, 순하게, 위안이 내리는 자리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저 작은 마을의 볼품없는 잡화점이 배경이다. 끔찍한 살인사건도 없고, 그래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과 진로를 고민하는 고민상담 편지가 32년의 시간 차로 엮인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등장하는 선연한 피 대신 이번엔 제법 훈훈한 판타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분명 기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결이다. 그럼에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2012년 출간 즉시 화제를 모았으며 급기야 국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중 가장 많이 판매된 소설이자 스테디셀러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히로키 류이치 감독(<바이브레이터>(2003), <가부키초 러브호텔>(2014))의 연출로 영화화됐다. 독한 설정을 밀어낸 그 자리에, 마치 조곤조곤 흘러 나오는 라디오 속 사연을 듣는 듯한 이 착한 사연의 파워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디어 애비(Dear Abby) 인생 상담 칼럼’을 줄기차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영자신문 칼럼난에 수년간 게재된 상담 코너로, 애비 여사, 그러니까 잡학다식한 여성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칼럼이었다. 연애 문제부터 가정 내 불화, 친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겪는 사소한 사건 모두가 애비에게 물어볼 고민 상담 소재가 됐다. 1956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시작해 2002년까지 무려 47년간 연재됐으니 미국인에겐 한 시대를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상담의 아이콘일 것이다. 사실 별반 와닿는 해결책은 없어 보였다. 진지하게 써내려간 고민에 비해 해결책은 너무 짧고 지극히 뻔해 김새기가 일쑤였지만 애비가 상담자에게 ‘Dear. OOO’ 하면서 시작하는 도입부만큼은 상당히 멋졌다. 뭔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데다 상담자의 고민을 한껏 존중해주는 것 같은 분위기가 그 짧은 호명을 통해 풍겼다고나 할까. 아마 사연을 보낸 상담자들 역시 애비의 충고보다는 자신의 사례가 신문에 게재되고 이름이 호명된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어떤 고민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준다’는 나미야 잡화점의 컨셉을 들었을 때, 예전의 그 디어 애비 칼럼이 떠올랐다. 온갖 잡화를 취급하는 지금의 ‘동키호테’처럼 나미야 잡화점은 문구류, 군것질거리, 생활용품 등을 취급하는 동네의 랜드마크였다. 상담도 잡화의 일종으로 분류되었던지 다정다감하고 인자한 잡화점 주인 나미야 유우지 할아버지(니시다 도시유키)가 접수하는 고민에는 특별히 따로 정해둔 영역이 없었다. 초반에는 ‘시험점수를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꿈이 우주 비행사인데 멀미를 해서 걱정된다’는 등 잡화점을 드나드는 아이들이 할 법한 귀여운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상점 이름 ‘나미야’를 ‘고민’이라는 뜻의 ‘나야미’(なやみ)로 제멋대로 읽은 아이들 때문에 시작된, 원작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등장하는 고민 상담소의 연원이다.

인생 상담소 잡화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평범한 고민 상담소에 그칠 뻔했던 나미야 잡화점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상담소로 변모한 데는 타임리프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부터다. 겉에서 보면 어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낡은 상점에 불과하지만 상점 셔터에 달린, 작은 구멍이 신기하게도 시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밖에서 구멍 안으로 편지를 밀어넣으면 상점 안의 우유통으로 고민이 담긴 편지가 사뿐히 떨어진다. 그렇게 떨어진 편지를 읽은 사람은 셔터 밖에 존재하는 1980년 과거 시간이 아닌, 2012년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무려 32년의 시간을 초월한 연결 고리다. 잡화점은 나미야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관리가 안 된 채로 오래 방치되어왔는데, 3인조 좀도둑 아츠야(야구치 아쓰야), 쇼타(무라카미 니지로), 고헤이(간이치로)가 이곳으로 쫓겨 들어오게 되고 편지를 집어들면서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폐쇄됐던 ‘비밀’ 우체통이 재개된 셈이다. 타임슬립해서 날아온 사연 그리고 그 사연의 주인공들의 고민이 각각의 짧은 단편처럼 하나하나 펼쳐지고 모인다. 뮤지션의 꿈을 꾸지만 가업인 생선가게를 이어나가야 하는 기로에 선 카츠로(하야시 겐토)의 절절한 사연, 부모 대신 자신을 길러준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술집에서 일하려는 여성 하루미(오노 마치코) 등 상담자에 따라 고민도 제각각이다.

재밌는 것은 나미야 할아버지 역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 고민 상담소의 상담자 중 한명이라는 점이다. 췌장암 말기로 3개월 선고를 받은 나미야 할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에 고민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충고가 상담자들에게 과연 도움이 됐을까, 혹시 섣부르지는 않았을까, 그 충고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매일 밤 그 고민에 기묘한 꿈을 꾼다는 할아버지는 “한밤중에 누군가가 가게 셔터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있다”라며 그것이 “예전에 상담을 하고, 답장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려주는 표시”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옛 연인 아키코(나루미 리코)와 함께, 할아버지의 시점에서 보자면 분명 미래에서 온 상담자들의 편지를 받게 된다. 바로 할아버지의 충고 덕분에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는 상담자들의 고마운 답례 편지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 강간, 복수, 살인 등의 센 소재들 위에 바탕해 있었고, 그로 인해 언제나 불행하고 고통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악행은 결코 ‘묻지 마 살인’같은 즉각적 충동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다. 유키호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끔찍한 연쇄살인, 그 살인사건을 쫓아가다 밝혀지는 유키호의 초등학교 동창생 료지 그리고 유키호를 향한 료지의 헌신적인 관계.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인 <백야행>의 뿌리깊은 인물 관계도는 사건과 인물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유성의 인연>이나 <방황하는 칼날> <용의자 X의 헌신> 등 그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사건에 대입시킬 수 있는 뼈대이기도 했다. 현재의 악행의 방정식을 설명하기 위해선 몇 십년 전 인물들의 유년기부터 이어져온 지독한 악연 혹은 깊은 사랑을 거슬러 올라가야 비로소 답이 구해지는 식이다. <유성의 인연>의 형사가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도, 그 관계가 이어져오는 지독히 긴 기간 때문이다. 신문, 방송을 떠들썩하게 할 피비린내 나는 살인사건의 반전과 전말. 결국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속 인물들이 평생 자신의 영혼을 잠식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위안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토록 강경한 사회파 추리소설을 통해 볼 때 나미야 할아버지의 따뜻한 상담 내용을 모아놓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의 저작물 중에서도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잠깐, 속을 뻔도 했다. 하지만 잡화점의 사연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속 사연 많은 인물들과 그리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특히 호스티스로 일하다, 미래의 청년 3인방의 상담 편지로 일본 거품경제에 발맞추어 투자를 해 돈을 벌고 여성 사업가로 명성을 얻게 된 ‘길 잃은 강아지’의 사연에 이르면 이야기는 궤를 맞추어나간다. 각각의 단편처럼 존재하던 상담 사연 그리고 인물들은 고아원 ‘마루코엔’을 통해 하나의 사연으로 재편된다. 하루미와 세명의 청년 그리고 생선가게 청년 카츠로와 그가 만든 곡 <Reborn>으로 유명세를 얻게 된 가수 세리에게 기억을 제공하는 마루코엔이라는 공간의 의미 그리고 1988년 발생한 화재로 인한 마루코엔의 전소가 그들 삶에 끼친 영향까지 더하고 나면, 이들의 사연은 더이상 우연이 아닌 따로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운명의 궤도 안에 엮여 있음을 알게 된다. 판타지적 요소를 걷어내고 나면 결국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타의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조를 형성한다.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또다시 ‘고통’, ‘성장’, ‘과거’, ‘인연’, ‘헌신’의 코드를 이전처럼 끄집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번엔 고민 상담 편지를 통해 인물들이 훈훈한 해결책을 강구해나간다는 게 다를 뿐.

미숙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독한’ 지점들을 뺀 순화 버전임에는 틀림없다. 이 영화의 훈훈한 분위기는 <바이브레이터>, <가부키초 러브호텔>, <스트롭 에지>(2015) 등을 연출한 히로키 류이치에 의해 완성된다. 시간 축이 여러 개인 데다 추리적인 요소, 판타지 장르의 색깔까지 더해지지만 감독이 다수의 작품에서 전개해온 코믹 드라마적인 분위기가 전반부의 톤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과거의 전차를 관통해 아츠야, 쇼타, 고헤이가 나미야 잡화점으로 들어가는 CG 장면 연출은 퀄리티가 의심스러운 완성도지만 오히려 그 ‘조악함’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아넘겨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정교하지 않은 완성도가 어쩌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속 상담과도 꼭 닮아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담은 어디까지나 내 경험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충고이자 조언이지 전문적 해답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 상담자가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아니듯, 상담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도 공인된 지식이나 권위는 없다.

영화가 ‘기적’을 만들어가는 동안 이 ‘미숙함’이 줄곧 따라다닌다. 아츠야, 쇼타, 고헤이는 뮤지션을 꿈꾸는 카츠로에게 대뜸 “재능이 없으니 관둬라”라는 답변을 아무렇지 않게 써서 보내기도 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숙하고 결점투성이인 젊은이들에게 상담을 전개하게 된 데 대해 “타인의 고민 따위에는 무관심하고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이라고는 한번도 없었던 그들이 과거에서 날아온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할까 궁금했다”고 말한다. 히로키 류이치 감독 역시 원작자가 말한 그 미숙함을 끌어안는다. “갈 곳 없던 세 청년이 일면식 없는 타인의 고민을 들어주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 원작이 가진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세 청년의 어설픈 상담은 오히려, 상담을 받는 이들의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고심이 더해지면서 완성돼나간다. 아마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이 넓은 세상에 내 고민에 잠깐이라도 귀기울여 들어줄, 그런 사람이 절실히 필요할 뿐.

나미야 잡화점 어떻게 만들었나

시간이동을 하자고 <백 투 더 퓨처>처럼 특수 자동차까지 발명할 필요가 없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2013)에서 팀(도널 글리슨)이 타임워프하는 도구는 아주 평범한 장롱이다. 장롱 안에 들어가, 그냥 두 주먹을 불끈 쥐면 시공간 이동!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타임워프 역시 셔터가 내려진 잡화점으로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끝.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미스터리한 공간인 잡화점의 비주얼 구현은 원작 팬들에게도 가장 궁금한 기대지점.

한 공간이지만 시대에 따라, 또 사연의 심각도에 따라 잡화점의 분위기도 달라져야 했다. 영화의 오프닝 신 나미야 할아버지가 한창 고민 상담을 해주던 시절의 잡화점은 말 그대로 활기가 넘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물건이 가득 쌓인 선반, 아이스크림 냉장고, 가게 문에 붙인 고민 상담 게시판 등 작은 마을의 상점은 1980년대 복고풍 컨셉의 미술로 정감 있게 만들어진다. 나미야 할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다시 찾은 잡화점은 이와 대조적으로 쓸쓸한 풍경을 연출한다. 한때 북적거리던 잡화점 풍경 대신 이제는 미래에서 오는 편지를 받는 우유통만이 강조된다. 32년 후, 폐점한 잡화점을 도둑 3인방이 다시 찾았을 때 잡화점의 모습은 또 한번 달라진다. 과거의 컬러는 없어지고, 낡은 잿빛 공간이 부각된다. 특히 편지가 도착하는 밤 장면 같은 경우, 촛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으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잡화점의 물건들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에 상담자들의 고민이 한가득 들어서는 모양. 진지한 상담의 장소로 변모해가는 공간의 목적성을 부각하는 비주얼이다. 한편 잡화점 내부는 모두 세트 촬영으로 이루어진 반면, 잡화점 외부 공간은 모두 일본 규슈 북동부에 자리한 오이타현 분고타카다시에서 촬영했다. 이곳 거리에 1980년대의 정감 있는 거리를 고스란히 재연한 덕분에 촬영기간 내내 마을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고. 덧붙여, 잡화점에 관해서라면 본편 말고 예고편도 놓치지 말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2016) 제작사 코믹스 웨이브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나미야 잡화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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