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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o③]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현장
임수연 사진 오계옥 2018-03-12

입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하자

왼쪽부터 이명숙 법무법인 나우리 대표,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 홍선주 어린이극단 끼리 대표, 이재령 음악극단 콩나물 대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매체와 단체가 몰린 자리였다. SNS상에서 미투(#MeToo) 운동을 촉발시킨 연극인들이 직접 참석해 발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자리는 충격적인 고백보다는 미투 운동을 계기로 연대하게 된 이들이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여기에는 법과 제도의 도움도 포함된다. 3월 5일 서초동 서울지방 변호사회관 5층 정의실에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연출가의 가해 사실을 최초로 폭로한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를 포함한 연극인 3명,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 이명숙 법무법인 나우리 대표, 고미경 한국여성의 전화 상임대표 등 9명이 발언하고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충분한 시간을 거쳐서 특별법 만들어라

이날 자리에 참석한 발언자들은 미투 운동이 각지에 흩어져 숨어 있던 사람들의 연대를 이끌어낸 것에 있음을 강조했다. 각자의 말하기를 통해 다른 이의 존재를 알 수 있었고, 피해자들이 힘을 합쳐 구체적인 행동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재령 음악극단 콩나물 대표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그 오랜 시간 서로 한번도 소통하지 못했나. 이번 미투를 통해 피해자 대부분이 처음으로 기억 저 안쪽으로 억지로 구겨 넣어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게 되었고, 우린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수희 대표 역시 “각자 집에서 혼자 고통받고 있었다. 이윤택 연출가가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각자 기수가 십수년 차이날 만큼 떨어진 관계였는데, 서로 친한 친구들끼리 먼저 연락한 후 가까운 기수부터 차례로 접촉해나간 결과 6명의 피해자가 먼저 모이게 됐다”고 전했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피해자들이 결집한 결과 2월 28일 총 16명의 고소인이 여성계·법조계의 도움을 받아 이윤택 연출가에 대한 형사고소장을 접수했다. 그리고 여성인권단체와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한국여성변호사회 등을 중심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명숙 대표는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우리가 함께하겠다고 격려하기 위해, 그리고 공익을 위해 우리가 모였다. 101명의 변호사 중에는 신입부터 30년 가까이 일한 연차 높은 분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남성도 30명 정도 된다”며 101인 공동변호인단에 대해 소개했다.

전문가 인력이 연대를 약속한 만큼 공동대책위원회는 가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 역시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먼저 이명숙 대표가 “언론에서는 공소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실질적인 처벌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런 말로 인해 피해자들이 위축되는 것이 걱정된다. 변호사들이 열심히 지원해서 성공적으로 성폭력 사실을 밝혀내 처벌한 사례도 많다. 1980년대 초반부터 2017년 초까지 이윤택 연출가의 가해 사실을 확인했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도하며 피해자들의 의지를 꺾지 말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각계의 연대가 새로운 입법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조현욱 변호사는 “여성들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언론이 힘을 합쳐서 동참하면 이 사회는 반드시 변할 것이다. 현실적인 법적 처벌뿐만 아니라 새로운 입법으로까지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명숙 대표는 일제강점기 위안부 할머니의 피해사례를 함께 언급하며 “다수의 피해자가 있고 오랜 기간 성폭력이 지속되었다면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처벌할 수 있는, 2차 피해를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따끔한 지적도 있었다. 이명숙 대표는 “성폭력 문제를 수사할 만한 인력이 얼마나 되는지, 전문성이 갖추어져 있는지 기자들이 취재를 해줬으면 한다. 이런 게 바뀌지 않으면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성폭력은 근절되지 않는다. 제발 정부에서 급하게 대안을 내놓지 말았으면 한다. 조두순 사건 때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이 100개가 넘었다. 1년이 지난 후 통과된 건 5개도 안된다. 2차 피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충분한 시간을 거쳐서 특별법을 만들어달라”고 촉구했다.

피해자 강조하는 보도 지양해야

이날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윤택 연출가의 가해 사실을 밝혔던 피해자들이 발언 중 눈물을 흘릴 때마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쏟아졌다. 이에 고미경 대표는 “고통받고 분노하는 피해자의 모습을 강조하는” 언론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지적했다. “이곳에 나오기까지 아주 큰 용기를 내신 분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달라. 얼마나 씩씩하게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씩씩한 모습으로 내보내줬으면 좋겠다.” 피해자들 역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편견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이윤택의 가해 사실을 폭로할 자격을 묻거나, 극단 자체에 선입견을 가진다든지 그들이 살아온 인생 자체를 동정하는 시선을 갖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홍선주 어린이극단 끼리 대표는 “미투 폭로 이후 개인적으로 연락을 많이 받았다. 너는 선생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러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내용을 어렵게 밝히며 “연희단거리패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학원에서 강사로 쓸 수 없다든지 공연 관객에게 보이콧을 받기도 한다”는 다양한 고충을 언급했다. 이재령 대표는 “전국을 돌며 많은 피해자를 만났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침묵하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하는 연극과 아름다운 기억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약하고 어린 시기였기에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열정이 넘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연희단거리패의 동료와 선후배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3월 1일 개소

연극계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영화계에도 상당한 폭풍을 몰고 온 가운데, 영화계에서 보다 거시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지난 3월 1일 개소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2016년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계기로 신고 및 상담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준비되어왔다. 2017년 1월 (사)여성영화인모임이 영화진흥위원회와 함께 ‘영화계 내 성범죄 대응 상설기구’ 설립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관련 여성단체 및 변호사 등 전문가의 자문을 거친 후 지난해 11월 전문위원을 위촉했다. 지난해 6월부터 800여명의 영화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실태 조사 결과는 오는 3월 12일 공개된다. 앞으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상담 및 조사·피해자 지원,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연구 및 정책을 제안하고 실태 조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임순례 감독과 함께 센터장을 맡은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촉발됨에 따라 정부 차원에서 상설기구를 운영하자는 논의가 나오고 있으나, 시의성에 맞춘 주먹구구식 운영이 될 수 있다.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기 전부터 차분하게 내실을 다지고 준비한 것이 든든의 차별점이다. <씨네21>의 #영화계_내_성폭력 특집 기사와 영화인들과의 연속 대담도 많은 동기 부여가 됐다”고 전했다. 한편 한국독립영화협회는 성평등위원회 규약 및 성차별·성폭력·인권침해 사건 처리에 관한 규정을 공식 발표하고, 신고 및 상담 접수를 위한 핫라인(kifv_hotline@kifv.org)을 개설했다. 또한 지난 2월 28일 인터넷상에 올라온 ‘OOO 회원의 성폭력가해사건’(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추가적인 피해 사실에 대한 접수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