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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은의 <뷰티풀 그린> 당신의 부탁
이동은(영화감독) 2018-04-04

감독 콜린 세로 / 출연 콜린 세로, 뱅상 랭동 / 제작연도 1996년

이 화창한 봄날 장례식이라니. 고인은 생전 따뜻한 계절에 숨을 거두고 싶어 했으니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좋겠다, 고인은. 원하는 날에 평안하게 떠났으니. 장례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빈소는 일찌감치 조문객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 사람이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USB요. 이 사람이. 그걸 모르나 누가. 고인의 지인이 건넨 메모리를 장례식장 사무실 PC에 연결했다. 옆에는 잠시 자리를 뺏긴 젊은 직원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니터를 함께 쳐다봤다. 동영상 파일이었다. 파일명은 ‘La Belle Verte 1996’. <뷰티풀 그린>이에요. 지인이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덤덤하게 말했다. 고인의 유언이었단다.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 영화를 틀어달라고. 근데 그래도 됩니까? 직원을 쳐다봤다. 다른 빈소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특별히 문제가 될까요? 쿨한 직원이었다. 문제가 생겨도 고인이 책임지는 걸로 합시다. 죽은 사람에게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빈소 한쪽에 상영 공간을 마련했다. 검은 옷을 입은 조문객들 사이로 검고 큰 TV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영화를 재생했다. 붉은 육개장을 먹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다가왔다. 몇몇은 고인의 영상편지라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오래전 영화라 그런지 처음 보는 이들이 많은 듯했다. 1996년이면 고인이 19살, 대학 1학년때였을 것이다. 아마 그에겐 오늘처럼 봄 같은 시절에 본 영화였으리라. 그런데 그가 죽고 지금 그를 대신해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는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1985)를 만든 콜린 세로 감독의 작품으로 주연까지 겸했다. 첫 장면. 온순한 히피 공동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푸른 언덕에서 자유롭게 회의 중이다. 각자 먹고 입을 것들을 평화롭게 나누다가 머나먼 지구 행성에 대해 걱정 섞인 얘기를 한다. 그렇다. 이들은 외계인들이었다. 이토록 무해하고 선량한 외계인들이라니(그리고 당연히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지구를 더는 지켜볼 수 없어 밀라를 보내기로 한다. 예전에도 선배 행성인인 예수와 바흐 등이 지구에 간 적 있다. 지구(당연히 파리)에 도착한 밀라. 우리보다 3천년 앞선 문명 출신 행성인이지만 그 꼴은 꼭 과거에서 온 사람 같다. 밀라는 매캐한 자동차 매연에 연신 기침을 해댄다. 아직도 돈을 사용하고 육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쓰러워한다.

외계인이 나오는, 어쩌면 SF물이었지만 자연이 더 많이 등장하는 잔잔한 식물성 영화였다. 참고로 무명 시절 마리옹 코티야르의 풋풋한 모습이 반가웠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가끔씩 피식 웃었다. 이게 뭐예요. 끝난 후 누군가 불만을 표했다. 슬픈 영화를 트는 게 관객, 아니 조문객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요. 차라리 코미디였더라면 더 펑펑 울었을지 몰라요. 뮤지컬이라면 따라 불렀을 텐데 말이죠. 무난하네요, 전 별 셋. 저마다 생각을 말했다. 어쩌겠는가. 사진 속 고인은 말이 없었다.

담배 한대가 생각나 밖으로 나갔지만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영화 때문일까. 고인은 왜 저 영화를 장례식에서 틀길 원했나. 이제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일까. 여기서 늘 고향별을 그리워하며 살았을지도. 만날 때마다 늘 지구에 적응 중인 듯한 어색한 모습을 한 고인이 떠올랐다.

말씀 좀 물읍시다, 이동은님의 빈소가 어딘가요? 근조 화환을 든 남자가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하얀 리본에는 한 영화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인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장례식에 영화라니. 자신의 작품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고인의 초기작엔 어김없이 장례식장이 등장했다. 미학적으로든 뭐든 매력 하나 없는 장소가 장례식장일 텐데 그곳에선 늘 크고 작은 이야기가 벌어졌다. 왜 그의 영화에선 장례식장이 많이 나올까. 모를 일이다. 이제는 물어볼 수 없으니 영영. 생의 순간은 어쩌면 소멸해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은 죽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장례식에서 만난 영화라니, 정말 인생의 영화일지도.

이동은 영화감독. <환절기> <당신의 부탁>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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