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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2002-04-19

편집장

회사 앞에 김밥마을이란 분식집이 있었다. 8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나이 예순쯤 되는 주인 아줌마가 아침 일찍 나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큰 찜통에 멸치와 무, 파 등등을 넣어 그날 쓸 멸치국물을 끓이는 일이었다. 빈속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구수한 냄새로 허기를 자극하는 그 국물이 서울 최고의 국물이라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그 국물로 만든 2800원짜리 잔치국수는 진정 장인의 작품이었다. 김밥마을은 대안의 식당이었다.

한달 전쯤 김밥마을이 사라졌다. 망한 게 아니라 그 옆에 네배쯤 되는 큰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간판도 시골나라로 바뀌었다. 나는 그 집에 잘 가지 않는다. 아줌마는 더이상 그 국물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아구찜, 닭도리탕, 돌솥밥 같은 ‘복잡한’ 음식을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다. 딱히 맛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건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김밥마을 시절의 그 국물이 돌아오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그 집에 잘 안 가게 될 것 같다. 시골나라는 기성의 식당이다.

따지고보면, 아쉬운 게 꼭 국물만은 아니다. 김밥마을에선 차림표에 상관없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 하면 아줌마는 그렇게 해주셨다. 지금은 아줌마가 그럴 용의가 있다 해도 그와의 넓어진 공간적 거리가 그 부탁을 어렵게 한다. 이런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다. 엄마손 식당도 서너배쯤 커진 다음엔 결국 점점 발길이 뜸해져 요즘엔 거의 안 가게 된다. 식당이 커지고 나서 이상하게 음식에 물기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물기가 아닌 거리감 같은 것이었다.

대안은 기성을 대체하지 못한다. 대체하는 순간 대안으로서의 역동성이 사라진다. 자기 안에 질서가 확립되는 순간부터 그 질서의 유지와 확대라는 목적의식이 자기를 지배한다. 영화계에서 창의적인 인디와 합리적인 메이저도 이런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충무로 영화사들이 기업화란 이름으로 거대화, 조직화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회사 앞 식당의 행로가 떠올라 꼭 멋져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우리도 그런 우려에서 자유롭지 않다. 꼭 남 흉보고 남한테 바랄 일만은 아니다. 국물이 여전한가가 중요하다.

대안의 영화제를 기치로 내세운 전주국제영화제가 4월26일 개막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또 <씨네21> 창간 7주년을 눈앞에 두고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대안은 늘 진행중이며 불완전하다. 그래서 더 멋진 데가 있다. 전주영화제가 김밥마을의 멸치국물 같은 영화제가 됐으면 좋겠다.

좌우지간 <씨네21> 식구들은 전주에서 데일리 만들고 있을 테니, 여러분도 영화 보러 많이들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