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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플레이어
김혜리 2018-05-02

<원더스트럭>

장애를 가진 캐릭터를 열연한 배우들이 시상식 시즌을 휩쓸 때마다 “왜 장애인 배우에게 같은 삶의 조건을 가진 인물을 맡기지 않는가?”라는 정당한 물음이 제기됐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와 <원더스트럭>(2017)의 배우 밀리센트 시먼스는 이에 대한 훌륭한 응답이다. 두개의 검은 우물 같은 눈을 가진 이 젊은 신인배우가 연기한 두 청각장애 캐릭터는 장애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동시에 소리 없는 세계에서 살아온 연기자만의 감각으로 깊어진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듣지 못하는 소녀 리건은 호러영화의 연약한 인질이 아니라, 죄의식과 싸우는 용감한 인물이다. <원더스트럭>의 로즈는, 영화가 그리는 두 시대 중 1920년대의 주인공으로서 그 무렵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무성영화적 아름다움을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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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원작 소설은 영화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작가 어니스트 클라인이 열광하는 1980년대 대중문화 아이템을 나열하는 데에 들어간 원고지가 전부 몇매일까 궁금한 이 책을 두고 “소설인가, 쇼핑 리스트인가”라는 반문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감독이 무려 스티븐 스필버그이긴 했지만, 영화의 우위는 예정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클라인이 (뽐내며) 말로 늘어놓는 영화와 게임과 음악을, 감독은 관객이 동시에 보고 체험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죠스>(1975)로 블록버스터가 영화산업의 주축을 이루는 시대를 손수 열었으나, 이제는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주의자로서 ‘라스트 맨 스탠딩’의 풍모를 띤 스필버그가 굳이 카탈로그 같은 원작 <레디 플레이어 원>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어쩌면 그는 더이상 장르, 스타, 오리지널 스토리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브랜드’의 조합으로 유지되는 블록버스터 시대에 “그럴거면 차라리 아예 통째로 레퍼런스들로 직조한 영화는 어때?”라고 반문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복잡한 대화와 안무, 액션을 동시에 정확히 전달하고 블로킹하는 세트 피스 장면들은, 클리셰를 구사할 거라면 이 정도 숙련도를 갖추라는 본보기 같다. 물론 근거 없는 짐작이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도 원작의 이야기로서의 약점을 완전히 보완하진 못했다. 열쇠 찾기에 성공해 가상세계 오아시스의 최대 지분을 차지해 풍족하게 살려는 목표가 전부였던 주인공 웨이드(타이 셰리던)가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과정은 다분히 모호하다. 대기업에 고용된 플레이어들의 천적으로 알려질 만큼 뛰어난 사만다(올리비아 쿡)가 중간 성적 1위에 오르고도 조력자를 자처하며 웨이드를 밀어주는 이유도 분명치 않다.

아무리 현실세계가 파투났다 해도 2040년대를 사는 인류가 유독, 고작(?) 1980년대 대중문화에 매료돼 있다는 설정의 근거는 딱 하나다(내 기억에 1980년대 유행은 다른 연대의 문화에 비해 매우 빨리 놀림감이 된 편이다. 1990년대 시트콤 <프렌즈>만 봐도 그렇다). 대다수 인구가 헤어나지 못하는 가상세계 오아시스를 창조한 제임스 할리데이가 1980년대 대중문화에 고착돼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문화에 관한 잡다한 지식을 누가 더 많이 알고 상호 연관을 유추할 수 있느냐가 막대한 상금이 걸린 우승자를 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레디 플레이어 원>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즘’(ism)이 있다면 그건 작가주의다. 창작자의 생애와 내면의 비밀에 대한 이해가 작품을 해석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열쇠라는 믿음. 웨이드와 친구들의 여정은 또 다른 버전의 <시민 케인>(1941)의 ‘로즈버드’ 찾기인 셈이다. 단 찰스 포스터 케인과 달리 제임스 할리데이는 사후에라도 세상의 관심과 이해를 갈망해 직접 보물찾기 미로를 디자인했다. 관점에 따라 과잉하다고 불평할 수도 있는 마크 라일런스의 연기는 오아시스라는 제국의 씨앗이 고독과 슬픔이었음을 분명히 하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내게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가장 매혹적이고도 공포스러운 설정은, 할리데이의 생전 기억을 플레이어들이 참조할 수 있도록 가상현실로 낱낱이 저장해놓은 버추얼 아카이브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미래의 이미지를 편집하는 광경을 연출했던 스필버그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과거를 재생하고 앵글을 돌리고 줌인한다. 이런 3D 영상을 저장하려면 평생 일상적으로 카메라와 마이크에 360도 둘러싸여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던 나는, 2018년 현재 내 방 안의 각종 기기와 CCTV의 촬영 및 녹음 기능을 헤아려보고 머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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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의 <아바타>’라고 <레디 플레이어 원>의 20자평에 썼다. 늘 그렇듯 급하게 둘러댄 표현이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두 모습 - 현실의 육체와 오아시스에서 활동하는 아바타 - 으로 등장한다. 예외는 둘인데, 악역인 IOI 대표 놀란 소렌토(벤 멘덜슨)의 오른팔로 현실과 가상현실에서 각각 활동하는 피날레(헤나 존 케이먼)와 아이록(T. J. 밀러)이다. 과연 피날레는 전혀 오아시스에 발을 들이지 않는지, 아이록의 실체가 누구인지 사연도 있을 법한데 140분의 러닝타임에는 담기지 못했다. 웨이드와 동료들의 아바타는 왜 그런 모습인지 특별한 설명이 불필요하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들처럼 더 쿨하고 날렵하고 강한 외양을 원할 테니까. 옵션으로 파시발(웨이드의 아바타)처럼 머리칼이 늘 바람에 멋지게 흔들리길 원하는 사람도 꽤 많겠지. 오히려 눈길을 끄는 아바타는 놀란 소렌토의 그것이다. 부와 권력을 소유한 자본가 소렌토가 오아시스에서 선택한 얼터 에고의 모습은, 음 그러니까, 부와 권력을 가진 자본가다. 다만 덩치를 키웠다. S자 형태의 앞머리와 역삼각형 체구를 슈퍼맨에게서 가져오고 비즈니스 정장과 넥타이까지 그대로다. 자산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참으로 가난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아바타와 관련해 내가 가장 많이 접한 반응은,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무기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했던 로봇 아이언 자이언트를 전투에 동원했다는 배신감이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첫 관람에서는 아이언 자이언트의 마지막 공헌이 파괴가 아니라 동료들을 건네주는 다리 역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아이언 자이언트는 아바타일 따름이라는 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아이언 자이언트는 본래의 캐릭터가 아니라 VR 게임 사용자가 필요대로 전용할 수 있는 레퍼런스다. 우리는 영화와 만화와 음악과 게임을 작가의 의도대로 수용하려고 어느 정도 노력하지만, 결국 개인적 결핍과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취하고 변형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관람한 후 감격스러운 노스탤지어에 젖는 관객이 이 영화에 인용된 캐릭터와 텍스트를 샅샅이 아는 팬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건담 피겨를 조립한 적 없고 심지어 상세히 아는 바가 없어도 <레디 플레이어 원>의 클라이맥스에서 건담이 검을 빼어드는 순간 박수를 칠 수 있다. <아키라>의 바이크를 몰라도 <샤이닝>의 블루레이를 소장하고 있지 않아도 환기(喚起)의 쾌감은 덜하지 않다. 관건은, 그 스토리와 캐릭터들이 개인에게 아직 생생한 과거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기호였다는 기억이다. “나 저거 알아. 당신도?” 스크린 크기와 사운드의 질을 제하고도 <레디 플레이어 원>을 극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봐야 제맛인 까닭이다.

<램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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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액션 히어로

<램페이지>(2018)는 팝콘이 소화되는 순간 잊혀질 부류의 영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스타 드웨인 존슨의 가치를 털끝만큼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하물며 <베이워치>(2017) 같은 재앙도 이 배우의 박스오피스 영향력을 절하하지 못했다. 드웨인 존슨은 초인적 사이즈와 힘을 보유한 고전적 의미의 무비 스타이자 육중한 호감덩어리다. 브루스 윌리스 이후 최적의 유머 타이밍을 지닌 액션 스타이며 <모아나>(2016)에서 입증했듯 노래도 잘한다. 게다가 다문화 시대에 적합한 다양한 혈통을 한몸에 가졌다. <쥬만지: 새로운 세계>(2017)든 <샌 안드레아스>(2015)든 실상 ‘드웨인 더 록 존슨 프랜차이즈’의 일부 아닐까. 신작 <스카이스크래퍼>의 예고편은 영락없는 개정판 <다이하드>다. 레슬러 더 록이 <스콜피온 킹>(2002)으로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회의적 반응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오늘날 배우 드웨인 존슨의 독보성은 명상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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