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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 어떻게 물들었나
윤가은(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8-05-30

출근길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풋풋한 고등학생 무리가 나누는 대화에 절로 눈이 떠졌다. 같은 반 여학생 누구누구가 똑똑하고 생각도 깊은 줄 알았더니 요즘 페미니즘에 너무 물들어 안타깝다는 이야기였다. “걔도 페미니스트였어?”라며 놀라 되묻는 학생을 슬쩍 훔쳐보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절망과 낙담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문득 한 친구가 내 인터뷰에 달린 댓글을 캡처해 보내준 일이 떠올랐다. 여성감독으로서의 개인적 고민과 짧은 소회를 담은 인터뷰에 “얘도 페미니스트들한테 넘어갔네”, “이 감독도 페미니즘에 물들어 큰일이다” 하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대체 언제 그런 불온한 사상에 물들었냐, 그래서 좋은 작품 만들겠냐며 장난스레 다그치던 친구와 한바탕 웃고 만 일이었는데, 어쩌면 그 댓글들도 누군가의 진심어린 걱정과 불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무겁고 복잡해졌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아우르는 용어다. 간단히 말해, 생물학적 성으로 인한 모든 차별에서 벗어나 성평등을 이루려는 운동이 페미니즘이고, 페미니스트는 곧 성평등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최근 페미니스트들의 계략에 넘어가 페미니즘에 물들었다’는 견해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내가 성평등주의자가 된 시점은 더 오래전이며,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이 평등하다는 개념은 내가 자란 집에선 숨 쉬듯 체득되는 자연법칙이었다. 나와 남동생은 여성과 남성의 권리와 책임과 의무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원하는 바에 최선을 다하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늘 느끼고 체험하며 자랐다. 하지만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을 가르쳤다. 성별 차이에 따라 의무와 책임, 기회와 성과가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을 매 순간 깨닫게 했다. 여자가 무슨 감독이냐며 시집가기 좋은 직업을 목표로 하라던 선생님들. 여자가 대표가 되니 역시 문제가 많다고 쑥덕거리던 남자 선배들과 좋은 스펙으로도 계속 취업에 실패하던 여자 동기들. 여배우와 여자 스탭들은 너무 까다로워 같이 일하기 불편하다는 동료들과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들. 여전히 세상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불평등과 차별을 받아들여야만 삶이 더 쉽고 편해질 거라고 매일매일 새로운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평등한 세계와 관계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너무 오래전에 엄마에게 넘어가 성평등주의에 물든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말,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가 “혹시 엄마가 페미니스트라 나를 진작에 페미니즘에 물들게 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엄마는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가볍게 무시하더니 다시 최근에 본 뉴스로 수다를 이어갔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연대하며 레드카펫을 행진했는데 너무 장관이었다며 직접 동영상을 보여주시기까지 하면서. 명백한 증거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엄마한테 물들었다. 그럼 대체 우리 엄마는 누가 물들인 거지? 다음엔 그걸 물어봐야겠다.